[김동주의 여행이야기]최후의 원시부족 '다니족'을 찾아서(3)

  • 입력 2003년 12월 15일 13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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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눈을 붙인것 같은데 주변이 어수선하여 일어나 보니 벌써 8시가 넘었다. 내 주변에는 실라스의 가족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내가 라니족의 움막에서 하루를 지낸 것은 이들 한테도 하나의 사건 이었다. 물론 와메나 공항주변에는 외지인을 위한 숙소들이 있고 발리엠 계곡의 곳곳에 트레킹하는 외지인을 위한 움막이 있지만 라니족의 주거용은 아니다.

실라스의 가족들도 길거리에서 외지인들을 만날 수 있지만 이렇게 마주앉아 가까이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라 누가 누구를 구경하러 온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내가 누었던 자리에는 주머니에 서 빠져나온 껌 한통이 있었는데 이 껌 때문에 모두들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식사로는 이들과 함께 찐 고구마와 커피로 때웠다. 이들 한테 식수는 빗물이나 계곡의 물을 이용할 수 밖에 없어서 이들이 끓여주는 커피를 들고 잠시 볼 일을 보러 나가는 시늉을 하고 땅에 쏟아 버리고 돌아왔다. 내 스스로 유난 떤다고도 생각 되었지만 만의 하나라도 배탈 날 걱정을 하면 별 수가 없었다. 발리엠계곡에는 비교적 물이 풍부한 편이지만 라니족은 목욕을 않는다. 어제 미리 준비한 미네랄워터로 고양이 세수를 하니 애들이 모두들 신기한 듯 쳐다본다. 이를 닦으려 치약을 꺼내자 먹을 것을 주는 줄 알고 달려들기도 하였다.

와메나에서 자야푸라로 가는 항공편도 일정하지가 않다. 일단 공항으로 가서 오늘의 항공편을 알아보니 오후가 되어야 비행기가 들어 올 것이라 하여 실라스와 그의 동생을 데리고 와메나주변의 푸기마 마을을 둘러 보았다. 마을 입구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푸기마 마을은 어릴 때 보았던 우리나라의 평화스런 농촌과 같았다. 이곳에서는 쌀 농사도 하는 것 같았다. 곳곳에는 양철 슬레트로 지은 집들이 보였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이들을 개화시키려고 지어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낮에 뜨겁고 밤에는 추운 양철슬레트 집을 다니족이 살 리는 없었다.

한 부락에서는 아버지가 남자아이를 목욕시키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서보니 열병에 걸려서 열을 내리게 하려고 목욕시키는 것이었다. 목욕물이라해서 깨끗하지는 않았다. 고지대여서 모기는 없는 것 같아 말라리아는 아니겠지하는 생각이 들어 갖고 있던 해열제를 주고 나왔다.

여기에도 공항주변에는 인도네시아인 의사가 있지만 병원 문턱이 높아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한 부락 마을을 방문 하였는데 그 곳에는 마침 새로 짓고있는 움막이 보였다. 움막은 우리나라의 원두막과 비슷한 형태로 짓는데 내부 구조는 2층으로 되어있다.

바로 이 2층의 움막구조가 성을 터부시하여 별거하는 부부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지에 대한 해답이 되었다. 울타리에는 호박처럼 생긴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그 속은 파먹고 큰 것은 물통으로 사용하며 가느다란 것은 남자들의 성기보호대인 코데카로 사용 한다고 한다. 어느 방송에서는 코데카의 길이가 신분에 비례한다고 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부락을 나와 걸어가는데 멀리서 벌거벗은 차림으로 우산을 쓰고서 따가운 햇볕을 피하는 노인이 보였다. "우산을 쓴 벌거벗은 다니족!" 멀리서 비디오에 담고 가까이 가서 카메라를 들이대자 파인더에 비친 그 노인의 표정은 결코 따뜻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순간 나 역시 이들을 희화적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돌아서고 말게 되었다.

이 마을에서 공항으로 우회하는 길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다. 학교 안에는 제법 많은 학생들이 있었으며 모두 옷을 입고 있었다. 실라스의 얘기로는 초등학교라도 무료교육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교육을 받으려면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한다. 중학교에는 남자와 여자 모두 교복을 입고 있었다. 공항으로 돌아 오면서 약 한 시간 동안 실라스와는 이들의 앞날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처음 방문하였을 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정신없이 돌아 다녔고, 두번째 방문에서는 이들의 입장을 어느정도 이해하고서 다니족을 대하고 보니 개방의 물결을 헤쳐나가기에는 너무나 힘이없는 이들한테 동정심도 생기게 되었다.

발리엠계곡이 외부에 알려지기 이전까지 이들은 먹는것, 입는것, 자는것 모두 나름대로의 부족함이 없이 자기들 부족끼리만 세력 다툼을 하면서 만족하게 지냈을 것이다. 그후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선교사들이 발리엠계곡에 들어와 이들한테 복음을 전파하고 교육을 시키고 옷을 입히게 된 지금에는 이들이 이러한 생활변화를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을까?

이들이 문명의 혜택을 입기 시작한 후에는 그 위력과 편리함에 새삼 놀라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이들은 이러한 문명의 혜택을 입으려면 그 댓가가 필요하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가진것 이라고는 고구마 밭과 돼지밖에 없는 이들한테는 그 댓가로 치룰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곧 느끼게 되고 이에대한 욕구불만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넉넉치 못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들을 무료로 입히고 먹여 살릴 능력은 없으며 막상 이들을 개화시킨 선교사들도 그들의 변화된 생활까지 책임질 입장은 아니며 그럴 능력도 없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들의 생활에 익숙해진 노년층들은 이러한 변화가 못마땅하게 여길 수 있지만 어려서 부터 외지인들을 접하게 된 젊은 층들은 그들의 전통생활방식에 익숙해지기 이전에 새로운 생활방식을 맛보고는 옷을 입고 화폐의 위력을 느끼게 된 것이다. 옷을 한번 입어 보면 더 좋은 옷에 대한 탐욕도 생기게 되며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들의 욕구불만은 늘어갈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발리엠계곡에도 와메나를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고 있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리안자야를 인도네시아와 결속시키기 위해 자바나 술라웨시등의 본토인들을 이라안자야에 이주시켜 상권은 자연히 이들 손에 넘어가 다니족은 각종 공사의 노동력 제공 외에는 참여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미 어려서부터 선교사를 따라 다니며 영어를 배운 젊은 다니족 청년은 외지인의 가이드로 그들로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다니족 청년은 외지인의 카메라 모델로 푼돈을 받고 지낼 뿐이다.

이제 이들사회에서도 우리나라 농촌의 이농현상처럼 마을을 떠나려는 현상이 가속화 될 것이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이들 사회에는 시장도 들어서고 가게도 있지만 발리엠계곡에는 술 반입이 금지되어 있다. 이곳을 개방 시킨 선교사들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아마 자제력이 부족한 이들의 불만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술먹고 발생할지도 모를 소요사태를 방지하려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이렇게 머리속으로 이들의 입장을 정리해 보니 길에서 마주치는 무표정의 다니족들의 모습이 더욱 측은하게 느껴지게 되고 그들의 앞날이 결코 밝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머리속에 떠 올랐던 영화 MISSION 의 마지막 장면을 그려보면서 이들이 Archbold에 의해서 발견되어 문명 사회속으로 들어온 것이 이들한테 행운인지 불행인지 부질없는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김동주/김동주치과의원장 drkimdj@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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