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아우슈비츠 ‘죄와 벌’…아이히만 사형 선고

  • 입력 2003년 12월 14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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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이 저렇게 평범하다니….”

아돌프 아이히만을 처음 본 한나 아렌트는 신음했다.

방탄유리에 둘러싸인 채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아이히만. 그는 국제적 관심을 모은 전범재판의 피고가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범속한 삶을 살아왔다.

학교 성적이 나빠 일찌감치 실업학교로 보내진 열등생. 실업자를 전전하다 엉겁결에 군에 입대했던 사회의 낙제생. 그는 나치 친위대 장교였으나 히틀러의 ‘나의 투쟁’조차 읽지 않았다.

법정에 증인으로 나선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예이엘 디무르는 그를 보고 혼절하고 말았다. 재판관이 물었다. “과거의 지옥 같은 악몽이 되살아났습니까.”

디무르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탄식했다.

“아이히만이 저렇게도 평범한 사람이라니. 저토록 평범한 인물이 그 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몰아넣었다니…. 나 자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내 안에도 아이히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애제자이자 저명한 정치학자였던 아렌트. 미국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을 자원해 재판을 추적했던 그녀는 자문한다.

티끌만큼의 죄책감도 없이 충실히 공무를 수행하고 아내를 사랑했으며 자식을 끔찍이 아꼈던 이 범속한 인간이 어떻게 ‘유대인 말살정책’을 기안하고 집행했는가.

그녀는 재판이 끝난 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표해 지성계의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악이 우리의 일상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실제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나의 전 생애는 칸트의 실천이성에 따라 살아왔다”며 자신의 행위는 칸트의 인식, 즉 ‘범주적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강변했다.

재판은 1년반을 끌었고 1961년 12월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 레드와인을 부탁해 반을 마셨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다.

“잠시 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끝내 자신의 죄(罪)를 알지 못하였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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