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이원규/지리산 반달곰아, 꼭꼭 숨어라

  • 입력 2003년 12월 12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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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 마고실이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 살다가 문수골의 외딴집으로 이사를 했다. 매화꽃이 필 때까지 늘어지게 겨울잠이나 자려다 ‘반달곰 탈출’ 소식을 들었다. 지리산에 첫눈이 내릴 무렵 반달가슴곰 ‘반돌’(3년4개월)이가 극적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관계 당사자들이야 발을 동동 구르겠지만 참으로 신선하고도 감동적인 뉴스였다.

지리산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위치추적용 발신기 교체를 위해 되잡았던 반돌이가 철망 밑을 파고 도망친 것이다. 현재 지리산에는 야생 반달곰이 6∼10마리 정도 살고 있지만 이들만으로는 오래지 않아 멸종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2001년 9월 관리공단은 반달곰의 자연적응 실험을 위해 우선 네 마리를 방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마리는 적응에 실패하고 현재 반돌이와 장군이 두 마리만 남았다.

관리공단은 그동안 방사 곰들의 위치를 추적하다 반돌이의 발신기 신호가 약해지자 포획했다. 올 5월에 54kg이던 반돌이의 체중이 114kg으로 늘면서 목 부위에 상처가 나 있었다. 치료 후 재방사하려고 발신기를 제거한 뒤 보호하던 중 반돌이가 유유히 사라진 것이다.

나는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연구자들의 프로젝트로 보면 일종의 실패겠지만 반돌이의 처지에서는 해방이자 스스로 쟁취한 사면복권인 것이다. 발자국 등으로 미뤄 지리산으로 들어간 게 분명하다니 더더욱 축하하고 경하할 일이다. 반돌이가 인위적인 굴레를 스스로 떨쳐버리고 지리산을 고향으로 삼았으니 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은가.

나는 네 살배기 반돌이를 믿는다. 더 이상 훈련된 개를 풀어 추적하는 등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반돌이는 지리산의 품에 기대어 어디에선가 겨울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기존의 야생 반달곰들을 만나 일가를 이룰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관리공단의 방사 사업은 절반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반돌이 때문에 성공한 셈이 됐다.

이제 스스로 목숨을 지키고 야생 곰들과 짝을 지어 번식을 하든지 말든지 그것은 순전히 반돌이의 몫이다. 사람살이의 일도 그러하지만 때로 돌봐주거나 보호해주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고 자생력을 저해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와 보호는 순전히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일 뿐 반달곰의 처지에서 보면 생존권을 위협받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반돌이를 위해서 국립공원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더 이상의 지리산 파괴를 막는 것이다. 먼저 861번 성삼재 횡단도로에 무공해 순환버스를 운행해야 한다. 지리산 전체가 주차장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일반차량을 통제하는 수밖에 없다. 일반차량이 국립공원을 24시간 통행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함부로 헬기를 띄워 산짐승들을 놀라게 해서도 안 되며, 지리산의 남부능선을 자르는 경남의 회남재 확장포장공사 계획도 백지화되어야 한다.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이 파괴된다면 반돌이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노고단과 반야봉을 올려다보며 외로운 반돌이를 생각한다. 산중 어느 바위굴에서 겨울잠에 들었을 반돌이는 비로소 나의 도반(道伴)이 되었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지리산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반돌이는 나의 스승이자 친구이며 후배다. 해마다 이사를 하며 지리산의 이곳저곳에 6년 정도 살다보니 나도 이제는 지리산의 자식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돌이는 나보다 늦게 입산했지만 그 적응력에 있어서는 나보다 한 수 위이니 그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반돌아, 꼭꼭 숨어라. 숨어서 겨울잠 푹 자라. 매화꽃이 피고 고로쇠 물이 오를 때까지.

▼약력 ▼

1962년 경북 문경시 하내리 출생. 98년 초 10년 서울 생활을 접고 지리산에 들어갔다. 지리산 이곳저곳에서 6년째 시를 쓰며 생명평화운동을 하고 있다. 98년 제16회 신동엽 창작기금상 수상. 최근 시집 ‘옛 애인의 집’을 출간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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