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점 탐험]12월8일 9일째 남극에 눈이 내리다

  • 입력 2003년 12월 11일 17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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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맑음, 오후 5시부터 화이트 아웃

기온 : 영하 18도

풍속 : 초속 6.8m

운행시간 : 07:30 - 18:30(11시간)

운행거리 : 24.7km (누계 : 114.2km)

야영위치 : 남위 80도53분 912초 / 서경 80도47분207초

고도 : 876m

아침 기상과 함께 서울에 연락하고 난 박대장의 얼굴 표정이 어둡다. 우리가 있는 곳과는 수천km나 떨어지긴 했지만 남극대륙에 있는 한국 세종기지 연구원 8명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푼타아레나스에서 우리 탐험대와 같은 호텔에 묵었던 적이 있어 더욱 가슴이 아팠다.

세종기지 소식에도 불구하고 어제 운행 종료 직후부터 맑게 갠 하늘이 아침에도 그대로여서 탐험대의 분위기가 모처럼 아침 시작부터 밝다. 그러나 막상 텐트 밖으로 나서니 아침바람이 너무나 차갑다. 온도계는 영하 18도를 가리키고 있다. 체감온도는 이보다 훨씬 더 내려갈 게 분명하다.

어쨌든 해가 에머랄드 빛 하늘의 한복판에서 설원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손가락장갑을 끼고 썰매를 꾸리는 일을 하고 나면 손끝이 아려온다. 감각이 없는 듯하지만 분명 아픈 느낌이다. '손끝 아림'을 푸는 방법은 몸을 달궈 손끝까지 온기가 돌도록 하는 것뿐이다. 그러려면 서둘러 출발하는 수 밖에 없다. 시린 손을 벙어리 장갑에 우겨 넣고 준비된 순서대로 앞장선 박대장의 뒤를 따른다. 설원을 걷는 기분은 흡사 망망대해를 나룻배로 노 저어 가는 기분이다. 바람에 뒤틀린 설원의 돌출부위를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먼 바다의 흰 파도를 보는 것 같다. 물결치던 바다가 순식간에 얼어버린 듯하다. 앞사람의 썰매를 뒤따르며 반복되는 동작만이 움직임의 전부이다.

오전 운행에서 박대장은 어제까지와는 달리 대원들과 호흡을 맞추며 서두르지 않는다. 5명의 탐험대가 일렬로 늘어서 썰매를 끌고 가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오전 간식을 먹고 다시 발걸음을 남쪽으로 재촉할 즈음 이제까지 탐험대를 뒤쫓던 패트리어트 힐의 산들과 우측방의 두 암봉이 모습을 감추었다. 완전한 모습의 설원이 전후좌우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것이다. 무한의 설원이 무대라면 5명의 탐험대원은 그 무대 위에서 춤추는 하루살이쯤 될까.

오후 2시 간식을 먹으며 바람을 등지고 쉬고 있는데 하늘에서는 눈가루가 햇살에 반짝이며 무수히 떨어져 내린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출발 후 얼마 되지 않아 오희준 대원 썰매의 연결 와이어가 끊어 졌다. 앞서가던 박대장을 불러 세우고 로프를 잘라 와이어를 대신한다. 탐험초반이라서 썰매의 무게가 그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벙어리 장갑을 끼고 있어도 손이 시린 마당에 막내 이현조 대원은 얇은 장갑만으로 썰매 끈을 잘도 갈아 끼운다. 지난봄의 북극 원정경험이 많은 도움이 된 것이다. 추위에 적응하기는 오희준 대원과 강철원 대원 역시 이치상 대원보다 한결 나아 보인다. 조금도 손 시려워 하거나 추워하는 기색 없이 궂은일을 척척 해낸다.

오늘 운행 지역은 대체로 완만한 오르막인데다 설원의 상태도 별로 좋지 않다. 화이트 아웃에 걸렸다면 무진 애를 먹었을 것이다. 다행히 해가 탐험대원의 주위를 계속 맴돌고 있어서 루트 파인딩을 해가며 좋은 눈을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간혹 분설에 빠져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후 4시경 설원 먼 끝부터 검은 띠가 시야에 들어온다. 블리자드가 시작되는 줄 알고 대원들은 일순간 긴장한다. 박대장의 걸음이 빨라지고 뒤따르는 대원들도 서두른다. 다행히 검은 띠는 하늘위로 높아지며 해를 가리는 구름으로 변했다. 그리고 시작된 화이트 아웃. 심하진 않았지만 종일 걸어 온 대원들은 또다시 발밑의 시야를 잃고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하다가 박대장이 운행을 종료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는다.

남극은 연평균 강수량이 70mm안팎으로 사하라 사막보다 건조한 상태가 계속된다고 한다. 강수량의 대부분이 눈인데 워낙 적은 량이 내리기 때문에 남극에서 눈 내리는 광경을 보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10여분 눈이 내렸다. 남극 탐험대원들에게는 올해 첫눈인 셈이다.

저녁식사 후 게시판을 열어보니 서울에도 첫눈이 왔다는 소식이다. 첫눈은 왠지 좋은 예감을 갖게 한다. 실종된 세종기지 연구원들이 모두 무사귀환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

남극탐험대 이치상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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