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세러피]'올드보이'…떨치기 어려운 '내 안의 기억들'

  • 입력 2003년 12월 11일 16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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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 중인 영화 ‘올드 보이’(감독 박찬욱)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오대수(최민식)가 군만두 맛으로 자신이 갇혀 있던 감금방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엄밀히 말하면 군만두의 ‘맛’이 아니라 ‘냄새’를 토대로 찾아간다는 쪽이 더 맞겠지만 말이다.

한때 ‘낯선 여자에게서 그의 향기를 느낀다’는 광고 카피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 짧은 말에는 의혹, 불안, 질투 같은 감정이 담겨 있다.

오대수의 군만두 속에는 15년 감금생활에 얽힌 억울함, 슬픔, 분노, 부끄러움 같은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 있고 군만두를 통해 감금방을 찾는 것은 곧 그 감정의 진원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는 그가 15년간 겪은 일들이 말로 표현되는 정도를 넘어선 경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후각과 관련된 기억은 감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올드 보이’가 들려주는 기억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는 몸에 새겨진 기억이다. 오대수는 감금방에서 가상의 적을 때려눕히는 연습을 한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는 자신의 연습이 유효했는지 반신반의하며 시험해보고 싶어 하는데, 이후의 액션 장면들을 보면 그가 싸움의 기술을 매우 훌륭하게 습득했음을 알 수 있다.

‘올드 보이’에서 가장 멋진 장면 중 하나인 소위 ‘장도리 액션’신에서 그는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반사작용처럼 몸을 움직여 싸운다. 그의 움직임은 몸에 새겨진 기억이 얼마나 강렬하며 본능의 일부처럼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알고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도 많은 일들을 해 내는 것은 그렇게 몸으로 익힌 기억들 덕분이다.

기억에 관한 세 번째 모티브는 오대수가 찾고 있던 ‘해답’이 그가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다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일을 당하거나 고통을 겪게 되면 오대수가 ‘악행의 자서전’에 과거에 잘못한 일들을 써 내려 가듯 그 이유를 찾아보고, 아마 어떤 일 때문이었을 거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정작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과 상처를 가하는 근원은 기억하지 못하는 영역에 있는 경우가 많다.

기억이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어린 시절에 형성되었거나 자아를 압도할 만큼 너무 강해 차마 언어화되지 못하면 그것은 ‘몬스터’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거나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을 빌려 표현된다. 혹시 오대수가 이우진(유지태)의 사연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도 그 사연이 사소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열일곱 살의 불안정한 사춘기 소년에게 너무 크고 불안했기 때문은 아닐까.

‘올드 보이’는 이렇듯 감각에 대한 기억, 신체에 아로새겨진 기억, 미처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에 대한 기록이다. 세 가지의 공통점은 모두 정체가 모호하고 말이 가 닿기 어려운 곳에 있지만, 되레 말로 기억되는 기억보다 훨씬 떨치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영화 후반부에서 오대수와 이우진의 ‘충격적인’사연을 듣고 난 뒤 그 둘의 내적 갈등에 몰입되기보다 ‘유지태의 손이 참 예쁘네’ ‘펜트하우스의 옷장이 정말 쿨하다’는 등의 비주얼에 자꾸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다. 왜였을까. 아마 아무리 충격적인 기억도 일단 그것이 말과 이미지를 통해 형태를 얻고 나면 그 힘을 조금 잃어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말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몬스터’는 이미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박 감독이 굳이 오대수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장면을 넣은 것은 오히려 금기의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순간 놀랐을 관객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조금 지나친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 경상대 병원 hjyoomd@unitel.co.kr

▼곁들어 볼 비디오/DVD▼

○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감독은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를 복수를 다룬 3부작 중 1, 2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영화에서 복수에 대한 묘사는 그 어떤 한국영화보다 강렬하고 잔혹하다. 선천성 청각장애를 지닌 류(신하균)는 누나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연인 영미(배두나)와 함께 중소기업체 사장 동진(송강호)의 딸을 유괴한다.

○ 메멘토

복수와 기억을 소재로 관객에게 두뇌싸움을 거는 지적인 스릴러. 레너드(가이 피어스)는 10분 이상 기억을 유지할 수 없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아내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인을 찾아내 복수하는 것. 10분이 지나면 자신이 뭐든 다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아는 그는 중요한 기억은 몸에 문신으로 새겨놓는다.

○ 본 아이덴티티

기억상실증에 걸린 미국 CIA 요원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를 찾아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스릴러. 제이슨(맷 데이먼)은 총상을 입고 바다를 표류하다 구출됐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그가 가진 과거의 흔적은 총상과 살 속에 묻혀있는 스위스 은행 비밀금고 번호뿐. 과거를 추적하던 제이슨은 CIA에 쫓기기 시작한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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