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동방의 詩聖…1913년 타고르 노벨상

  • 입력 2003년 12월 9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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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성자(聖者)였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일찍이 코리아를 그렇게 일컬었듯이 그는 ‘동방의 빛’이었다.

타고르의 시에는 벵골의 숲과 갠지스강의 온유한 평화가 깃들어 있다. 동양의 심원한 사상과 인도의 종교적 영험이 새벽이슬이 맺히듯 시어(詩語)로 응결된다.

간결해지고 소박해져서 더없이 평이하고 단순한 노래. 영국의 시인 예이츠가 말한 대로 영혼의 천연(天然)함에 스스로를 맡기는 그 무엇.

타고르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한때 비밀결사에 가담해 독립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와 세 아이의 죽음을 겪은 뒤 그는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했던 정치활동을 접는다. 그리고 1908년 이후 줄곧 경건한 종교시인의 길을 걸어왔다.

그의 대표작 ‘기탄잘리’는 이때 탄생했다. 103편의 연작 종교시를 묶은 이 ‘신에게 바치는 송가’는 그가 직접 영어로 옮겼고 1913년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타고르는 20세기로 넘어가는 ‘슬픈 아시아의 역사’에서 비켜설 수는 없었다. 당시 식민지 지식인의 업보였던 ‘아이덴티티의 난반사(亂反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

인도인이면서도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의 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았던 타고르. 그는 인도의 정치적 해방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간디와 공공연히 철학과 사상의 차이를 노출했다.

스웨덴 한림원이 끝내 간디에게 노벨상 수여를 거부하면서 타고르에게 기꺼이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준 연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만유(萬有)의 혼탁과 시름을 품고 말없이 흐르는 갠지스강의 후손인 인도인들은 두 사람을 성자로 추앙할 뿐 그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

타고르는 6000여편의 시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두고 한탄했다. “내 시는 실패작이야. 최선을 다했지만 늘 무언가가 빠져 있었어….”

타고르가 ‘기탄잘리’에서 읊었듯이 그는 ‘아직 떨어지지 않은 소나기의 짐을 지고 나직이 떠 있는 7월의 비구름같이’ 쏟아내지를 못하고 그렇게 머금다 간 것일까.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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