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한국 첫 만화가 이도영 선생 타계70주년 전시회

  • 입력 2003년 12월 8일 17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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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山(산)으루 가며 復國(복국), 져 山(산)으루 가며 復國(복국), 復國 復國 復復國(복국 복국 복복국)”

1910년 4월10일 ‘대한민보’에 실린 시사만평 ‘배우창곡도’(俳優唱曲圖)는 민요 ‘새타령’의 후렴구인 ‘뻐꾹’을 발음이 비슷한 ‘복국(復國·나라를 되찾자)’으로 고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자는 열망을 담았다.

이 만평은 한국 최초의 만화가로 꼽히는 관재 이도영(貫齋 李道榮·1884∼1933·사진)의 작품. 그는 1909년 ‘대한민보’를 통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의 만평을 선보여 한국 만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대한민보는 대한제국 당시 발간된 민족지 중 하나다.

이도영의 시사 만화는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대한민보’ 1면에 실렸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열망이 담긴 ‘배우창곡도’. 사진제공 한국만화박물관

경기 부천시 한국만화박물관(이사장 성완경)은 올해 이도영 타계 70주기를 맞아 그가 ‘대한민보’에 게재했던 만화 중 90점을 17일부터 내년 3월까지 이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한다.

이도영은 일제의 강제합방 움직임에 저항해 반일적이고 계몽적인 만화를 다수 그렸다. 그는 이완용과 그의 며느리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피한다는 ‘자부상피’(子婦相避)를 나뭇꾼이 스스로 도끼에 찍혀 상처를 입는다는 ‘자부상피(自斧傷皮)로 바꿔 풍자하거나 친일파의 성(姓)을 윷놀이의 패 이름으로 활용해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기꺼워하는 등 필화의 위험을 무릅쓴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이도영은 18세 때 당대의 유명한 한국화가인 안중식, 조석진의 문하생으로 전통 화법을 익혔으나 당시로서는 드물게 원근법에 충실한 그림을 그렸다. 1910년 만평을 그만둔 뒤에는 안중식이 교수로 있던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그림을 지도하고 중국식 정물화인 ‘기명절지화’를 한국화하는 등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최석태씨는 “이도영의 만평은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그림 자료로는 거의 유일하다”며 “이도영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총독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를 실명으로 비판하는 등 저항정신을 표출했다”고 말했다.

한국만화박물관은 ‘이도영 만화 목판 인쇄하기’ 등 체험코너도 개설한다. 032-320-3745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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