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강화도령…1863년 조선조 철종 승하

  • 입력 2003년 12월 7일 18시 37분


코멘트
1863년 조선조 제25대 왕 철종이 승하했다. 본명 원범(元範)의 나이 33세. 재위 14년 만이었다.

그것은 조선왕조 오백년 사직이 명운을 다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왕정(王政)은 이어졌으나 조선왕조실록은 마침내 대가 끊기고 말았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이 있지만 일제가 설치한 이왕직(李王職)에 의해 그들의 입맛대로 편찬됐을 뿐이다.

철종조에 이르러서는 왕통(王統)마저도 희미해져 갔다. 헌종이 숨지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왕가의 법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농투성이 ‘강화도령’을 임금으로 앉혔다. 순원왕후는 안동(安東) 김씨 일문(一門)의 좌장격인 김문근의 근친이었다.

정치적 배후가 없는 철종이야말로 안김의 세도정치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로 삼았다. 철종은 재위 내내 안김 일문의 ‘데릴사위’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철종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온화한 농부의 천성을 타고났으며 검소했고 영민한 자질도 엿보였다. “내가 고기를 많이 먹으면 백성들이 본을 받아 가축들이 많이 상할까 저어된다.”

철종은 빈민 구제나 이재민 구휼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짧은 학문과 경륜에다 자격지심까지 겹쳐 세도정치를 혁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점차 국사를 등한히 했다. 철종은 단명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 조로(早老)했다. 점차 여색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권력의 탐닉(耽溺)이 아니라 권력으로부터의 도피였다. ‘바보 철종’은 안김의 강고한 세도 앞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안김 일문은 왕족 중에도 그들에게 장애가 될 인물이 있으면 제거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왕실의 종친들에게 기개와 의분은 곧 죽음을 뜻하였다. 성군(聖君)의 자질과 품성은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철종은 후사를 두지 못했다. 철인왕후 김씨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나 일찍 죽었고 후궁과 궁녀들에게서 얻은 아들 넷도 단명했다.

그렇게 조선 왕조는 씨가 말라 갔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