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오늘]20세기의 선악과…맨해튼 프로젝트 승인

  • 입력 2003년 12월 5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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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남부 앨라모고도 트리니티. 카운트다운 ‘제로’와 함께 불덩어리가 치솟으며 찰나의 인공햇빛이 사막에 뿌려졌다.

“그 순간, 영원이 전개되면서 시간의 흐름이 멈추었다. 갑자기 우주가 한 점으로 수축했다. 그것은 마치 땅이 열리고 하늘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시각 포츠담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폐허의 도시 베를린에 있던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극비 전문을 읽고 있었다. ‘아기가 건강하게 탄생하였습니다.’

건강한 아기의 이름은 ‘뚱보(Fat Man)’.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될 플루토늄 239폭탄이었다.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서명한 지 3년여 만에 힌두교 경전의 불길한 구절은 현실이 되었다. ‘나는 죽음이며 세계의 파괴자이노라.’

맨해튼 프로젝트를 둘러싼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행적은 과학계의 금언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모든 과학의 발견은 중립적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중립적일 수 없다.’

1939년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폭개발을 권고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는 원폭실험이 임박해 오자 원자탄을 실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편지를 다시 보냈으나 대통령은 이를 받아보기도 전에 급서하고 말았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일선에서 진두지휘했다. 그는 ‘마법과도 같은 지도력’으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노벨상급 과학자들을 이끌었다. 그는 원자탄을 어디에 어떻게 투하할지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겪고 나서 이내 원폭개발을 후회했고 수폭개발에 적극 반대로 돌아선다. 그는 이 때문에 매카시 선풍에 휘말려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조사받아야 했다. 그는 결국 원자력 기밀사항에 대한 접근을 일절 금지 당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그 절멸(絶滅)의 순간에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절규했다고 한다. “물리학자들은 마침내 죄를 알고 말았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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