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연애의 시대'…"모던뽀이-모던껄 얼마나 진화했나"

  • 입력 2003년 11월 7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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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시대 /권보드래 지음 /288쪽 1만3000원 현실문화연구

“마치 1990년대 초의 서울 압구정동 오렌지족이 그랬던 것처럼 ‘모던뽀이’ ‘모던껄’이란 이름으로 수사되었던 군상들이 점차 현대를 상징하는 인간으로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주의와 주장으로서의 현대가 아닌 일상의 현실로서 현대를 말하기 시작했으며….”

1999년 출간된 김진송의 책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1930년대 당대인들이 구현한 현대성의 특질을 ‘일상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맞물림’이라고 통찰했다.

‘서울에 딴스홀…’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올 2월)를 계보적으로 잇고 있는 이 책은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남녀간 연애를 통해 일상 영역에서 우리에게 근대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는지를 검토한다.

3·1운동이 좌절로 끝난 1920년대. ‘자라서 무엇이 되겠느냐. 정치가도 될 가망이 없고 실업가도 될 가망이 없고…’라고 좌절했던 젊은이들은 연애에 들떴다.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사랑이 생기기 전에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이 먼저 자라난 것’이며 ‘구체적 대상 없이도 존재하는’ 감정이었다. 게다가 이 사랑은 ‘비극에의 욕망과 손잡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화복씨! …나는 이제 하루가 지나지 못하여, 그만 죽을 사람이외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살았어요! 그리고 당신을 위하여 죽어요! 애인을 위하여 살고 애인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요!”

1924년 베스트셀러였던 연애서간집 ‘사랑의 불꽃’에 실린 편지 ‘독약을 마신 후에’의 구절이다. 가상의 편지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1923년 6월 부호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반대에 부닥치자 애인이 보는 앞에서 음독자살한 기생 강명화의 사건은 이 연애 열풍의 클라이맥스였다. 저자는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 김우진 등 1920년대 숱한 자살이나 정사(情死)의 원인에 대해 ‘죽음에 직결된 열정만큼 개인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없다’고 해석한다. 이 시대를 달군 연애열은 결국 자아, 내면의 발견에 이르는 열병이었다는 분석이다.

최근 출간된 한일 공동연구서 ‘신여성’(청년사) 역시 근대적 개인의 발견으로서 ‘신여성’의 존재와 그들의 애정관을 재해석한다. 일본 가고시마 국제대 이노우에 가즈에(井上和枝) 교수는 논문 ‘조선 신여성의 연애관과 결혼관의 변혁’에서 지금껏 조선 근대여성사 연구가 독립운동에서 여성의 역할 서술 정도에 그치다 보니 ‘개인’으로서의 여성 해방이나 섹슈얼리티 문제를 제기한 ‘신여성’의 존재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가 주목한 두 ‘신여성’은 김일엽과 나혜석. 1924년 신(新)정조론을 주창한 김일엽은 정조에 대해 ‘사랑을 떠나서는 타 일방에서 구할 수 없는 본능적 감정’이라며 결혼 여부가 아니라 근대적 사랑에서 정조의 존재를 찾았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935년 나혜석은 “정조는 취미다. …우리의 해방은 정조의 해방으로부터 할 것이니…’라는 급진적 선언을 한다.

근대적 자아로 가는 도정에서 ‘연애’ 혹은 ‘사랑’을 징검다리로 삼으려 했던 식민지 시대 모던뽀이, 모던껄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인 21세기의 자아는 그로부터 얼마나 진화해 있는가.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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