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교수 “다수이익 내세워 소수인권 희생 안돼”

  • 입력 2003년 10월 6일 18시 06분


코멘트
슬라보예 지젝 교수는 당뇨를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가까이 기자들의 질문에 열정적으로 답했다. -김미옥기자
슬라보예 지젝 교수는 당뇨를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가까이 기자들의 질문에 열정적으로 답했다. -김미옥기자
“타자(他者)를 너무나 쉽게 나와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현대 사회는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반성해야 합니다.”

자크 데리다 이후 유럽 철학계를 주도하는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슬로베니아의 슬라보예 지젝 류블랴나대 철학과 교수(54)는 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나는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라며 이라크전쟁의 의미나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지젝 교수는 한국철학회가 주최하는 다산기념 철학강좌 일곱 번째 강연자로 초청됐다. 그는 5일 내한해 12일까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주제로 서울대 서강대 계명대 등에서 네 차례 강연할 예정이다.

지젝 교수는 이라크전과 관련한 미국의 행보에 대해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조용한 혁명(soft revolu-tion)이 진행 중”이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비판했다. 예를 들어 미국 언론은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정보들을 캐냄으로써 ‘많은 인명을 구하는 명분이라면 알 카에다를 고문해도 되지 않느냐’는 문제를 공론화하고 있다는 것. 이를 통해 인권 유린의 대표적 사례인 고문이 상황에 따라 정당화돼 버렸다는 주장이다.

지젝 교수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사람들은 카페인 없는 커피를 마시고, 당분이 없는 초콜릿을 먹으며, 버추얼 섹스를 추구한다. 쾌락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전도된 쾌락 추구가 자본주의의 본질이 돼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20세기를 철학적으로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우리를 장악했던 큰 통치 개념에서의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평범한 삶 속에 그대로 물화(物化)돼 나타나고 있다”며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 말했다.

1990년 슬로베니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그는 그 후 정치와 인연을 끊었다며 “철학적 이념을 현실에 적용하면 정치가 더 잔인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강연 문의는 한국철학회 홈페이지(www.hanchul.org) 참조.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