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반병희/'니르바나' 적 정책의 오류

  • 입력 2003년 8월 3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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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최근 한 모임에서 “시장을 지배하는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된다”며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현 정부의 ‘반(反)기업 정책 기조’가 기업 활동을 위축시킨 요인 중 하나였다는 지적을 감안하면 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반가운 일이다. 특히 시장경제의 핵심인 과학기술 발전과 시장의 자율성을 강조했다고 하니 노 대통령에게 따라다녔던 ‘반(反)시장주의자’라는 오해가 이번 기회에 말끔히 씻겼으면 한다.

그런데 막상 정부 부처 정책결정자들의 행태를 보면 노 대통령이 의미하는 시장경제가 무엇인지 헷갈린다.

최근의 사례만 보자. 정부 고위 관료가 불법쟁의 중인 노조간부들을 ‘모셔다’ 놓고 이 얘기 저 얘기 다해 놓고는 “법과 원칙을 지켰다”고 주장하고 있는 데에서나, 부실 신용카드사 문제를 처리하면서 대주주인 대기업에 증자를 종용한 모습에서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강철규(姜哲圭) 공정거래위원장이 삼성그룹 고위 인사를 만나 삼성전자를 그룹에서 분리시키는 것을 권유한 것도 시장원리와는 어긋나는 듯하다.

시장경제체제에서 기업이 어떤 지배구조를 선택하느냐는 것은 개별 기업의 고유 권리다. 그런데도 정부가 개별 기업의 안살림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정부 의지대로 하겠다’는 정부주도형 경제순결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는 케인스는 일찍이 “경제는 항상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불완전성을 띠고 있으며 상하기 쉬운 양모(羊毛)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충고했다.

미국의 석학 해럴드 덤세츠는 ‘니르바나(Nirvana)의 정책적 오류 함정’이라는 개념으로 케인스의 경구를 한층 구체화시켰다.

니르바나, 즉 열반(涅槃)이란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난 경지를 말한다. 덤세츠 교수는 정부가 특정 이념 아래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개입하는 것을 ‘니르바나적 정책 접근’이라 부르고 있다. 이런 접근은 경제 이상론자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시장이 제 기능을 못해서’라는 명분으로 과도한 시장개입을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독립 법인화 권유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신념을 우선시하다 보니 니르바나 오류의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닐까.

시장경제는 현재의 잘못을 하나하나 고쳐 나가며 좀 더 나은 상태로 진화해 가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인 듯도 하다.

물론 정부의 개입이 일정 부분 필요한 때도 있다. 시장기능에만 맡겨두었다간 ‘시장의 실패’가 우려될 때 그렇다.

경쟁력 이론의 대가인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는 ‘다이아몬드 모델’로 산업과 국가 경쟁력 관계를 설명했다. 그는 한 국가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피해야 할 독소(毒素)로 ‘경쟁 억제’와 ‘정부의 무분별한 시장개입’을 꼽고 있다. 성공적인 정부의 역할은 시장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이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데 있다는 설명이다.

굳이 포터 교수의 지적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상론에 치우친 정부의 무분별한 시장개입과 규제가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고 자율 경영을 해치는, 또 개별 기업은 물론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음을 정책결정자들은 깊이 인식해야 한다.

한 국가의 번영은 이상(理想)과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시장 참여자들의 자발적 에너지가 응축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반병희 경제부차장 bbhe4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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