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381…아메 아메 후레 후레(57)

  • 입력 2003년 7월 31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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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커다란 건물이 기쿠야 백화점이다. 바로 앞에 있는 골목길로 들어가면 술집 거리고. 밤이 되면 줄줄이 내단 전구가 가로등처럼 빛나지. 시나노마치하고 수직으로 만나 동쪽으로 쭉 뻗어 있는 길이 보이지, 저 길 좌우가 나니와마치다. 아직 셔터를 올리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악기점, 과자가게, 카페, 댄스홀, 오뎅가게, 국수가게, 장어구이집, 옷가게, 구두 가게, 시계포, 철물점, 골동품가게, 단팥죽가게….”

“없는 게 없네요.”

“그래, 이 대륙에는 없는 게 없지. 뤼순에는 니혼바시도 있고, 긴자도 있다. 없는 건 황거(皇居) 정도랄까, 하하하하하.”

눈이 본 것을 머리에 집어넣을 수가 없다. 소녀는 어느 집 마당에 길을 다 덮어버릴 듯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자귀나무 꽃을 쳐다보기가 고작이었다. 솔처럼 생긴 엷은 빨간색 꽃으로 손가락을 뻗는데, 끼 끼익 하는 소리가 나면서 시나노마치 정거장에 녹색 시전이 멈췄다.

시전이 간베 거리 한가운데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양쪽 길에는 마차와 인력거, 합승 버스가 달리고 있다. 신학기를 맞아 사십여일 만에 만난 검정 교복에 사각모를 쓴 남학생,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들은 웃으면서 조잘거리는데, 노릇노릇한 셔츠를 입은 노동자들은 찍소리도 하지 않고 무언가를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봄에 산둥에서 범선을 타고 돈벌이하러 온 노동자들이다, 다롄에는 기름 짜는 일이며 짐을 싣고 나르는 일이 많으니까. 노동자들은 노동자 전용 시전이 따로 있는데, 처지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타고 있다니. 창콜로들은 일본말을 모르니까,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가 않아. 어이, 냄새, 이 마늘하고 양파 냄새라니, 지독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사냥 모자를 쓴 남자는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코를 막고 비틀거리며 어깨로 노동자의 어깨를 툭 치고 팔꿈치로 옆구리를 힘껏 쳤다.

앗, 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소녀와 노동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심장이 쿵쾅쿵쾅 방망이질 쳤다. 이 사람은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일본 사람처럼 일본말로 얘기하는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소녀는 두 팔로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심장을 꽉 눌렀다.

남자는 문을 닫듯 얼굴을 닫고 아침 햇살에 수줍어하는 아름다운 거리로 눈길을 돌렸다. 항구로 이어지는 큰 길은 전시 중이라 여겨지지 않을 만큼 풍요롭고 넉넉했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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