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 ‘백마타고 오는 超人’은 없다

  • 입력 2003년 7월 29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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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기다리는 사람인가? 이육사(李陸史)는 ‘청포 입고 찾아올 사람’을 위해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었다. 그와 함께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겠다고 했다. 백마 타고 올 초인(超人)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목 놓아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칠흑 같던 민족의 수난기에도 앞날을 기다리며 의연하게 노래했다. 그 믿음과 그 기품에 새삼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영웅과 거리 멀어 ▼

그러나 정치학자는 생각이 다르다. ‘청포 입고 올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한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과연 그를 반겨 맞아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따져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없다. 그런 사람을 기다리려면 민주주의는 포기해야 한다. 아무리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한 시절이라 하더라도 정치학의 기본 정리(定理)는 바뀌지 않는다.

나라 걱정이 커지면서 다들 마음이 급하다. 정치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원망이 줄을 잇는다. 그런 비관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게 되고, 결국 오늘날의 ‘인물 없음’에 대한 한탄으로 이어진다. 한때는 김구, 신익희, 장면 등 괜찮은 정치인들이 숱하게 많았다. 지금은 왜 그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국민의 신망과 존경을 받는 정치인이 한 사람만 있어도 나라 형편이 달라질 것이라는 안타까움에 ‘박정희 향수(鄕愁)’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다.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고약한 정치제도다. 도대체 위대한 인물을 키우지를 못한다. 토크빌이라는 사상가는 이것을 민주주의의 숙명이라고 진단했다. 건국 직후 미국에는 쟁쟁한 대정치가들이 많았다. 그러나 50년 정도 민주주의를 착실하게 발전시키고 나니 위대하다고 이름 붙일 만한 정치가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고만고만한 정치인(little giant)들만 남게 되었다.

왜 그럴까. 민주주의의 핵심은 평등이다. 평등의 마법에 도취하게 되면 남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미국 사람들은 뛰어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신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훌륭한 정치인이 성장하지 못하는 1차적 이유다. 그러나 국가적 위기가 도래하면 국민이 정신을 차리고 진정 훌륭한 사람들을 지도자로 선출하게 된다. 상황이 영웅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영웅의 불편한 관계는 더욱 심층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시대에 따라 영웅이 출몰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별 사람이 없다. 그저 조작된 카리스마, 은폐된 진실이 영웅을 만들 뿐이다. 민주주의는 이 허울을 벗겨 준다. 지금이라도 10년, 20년 장기집권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무자비한 철권통치와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으로 분식(粉飾)할 수 있다면 스타는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이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언론이 영웅 놀음을 허용하지 않는다. 언론이 숨죽이던 시절에는 유명 정치인들의 이런저런 인간적 한계가 감추어지고 때로는 미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세상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거울처럼 비쳐지듯 하며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가용 권력자원은 예전 같지 않은데 그 실체적 진실은 대중 앞에 모두 드러내야 한다. 이러고도 영웅이 탄생한다면 그는 인간이 아닐 것이다.

▼상식과 순리 따른 정치 바랄 뿐 ▼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평등과 언론 자유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30년 전의 박정희 품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토크빌의 말처럼 민주주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짓이다. 그렇다면 영웅 부재의 오늘에 대해 푸념할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하자면서 백마타고 오는 초인을 기대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요, 자기모순이다. 술을 마시면 잔은 비워지게 마련인 것이다.

독일의 대학자 막스 베버는 대의(大義)에 헌신하며 균형감각을 갖춘 열정적 정치가를 그렸다. 그러나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그리 대단한 인물을 기대하지 않는다. ‘역사와의 대화’는 안 해도 된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상식과 순리에 따라 정치를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도 대통령 하기 힘들다고 한다. 정치학자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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