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김병익/화해의 전제

  • 입력 2003년 7월 27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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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포럼’ 필진이 예고되자 내게 e메일이 한통 날아왔다. 해직기자 모임에서 보낸 그 편지는 요컨대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신문사에 기고하는 일을 재고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칼럼 청탁이 왔을 때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려해서 수락한 것이었지만, 막상 이런 권고를 받으니 마음 편할 리 없었다. 이 사정을 인터넷의 가족 커뮤니티에 띄워 아이들의 의견을 물었다. 미국에 유학 가 있는 아들은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고 사정은 분주하게 바뀌는데 아직도 30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그것에 매어 있어야 하느냐”는 대답을 해왔다. 직접 체험해서 그 쓰라린 전날의 일이 각인된 노년층 사람과 어떤 말로도 그 사건을 실감할 수 없는 젊은 세대간에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 있는 상반된 견해의 틈에서 고민하는 내게 문득,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 말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역사의 상처’에 매어 있을수야 ▼

아마 나는 이 구절을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말을 다시 만난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를 통해서였다.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했기 때문에 27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출옥한 만델라는 백인 정권의 대통령인 데클레르크와 대화하며 새 정부 수립을 추진한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만델라는 투투 주교를 위원장으로 한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립하고 과거청산 작업에 들어간다. 만델라와 함께 1993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데클레르크는 흑인을 학대한 모든 범죄에 전반적인 사면을 요청했지만 만델라는 “범인이 진실을 밝히고 그들의 행동이 정치적 동기였음을 증명하면 개인별로 사면을 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때 그가 한 말이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나 결코 잊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주 85회 생일을 맞았던 만델라는 1998년의 ‘진실과 화해위원회’ 보고서에서 그가 이끌었던 아프리카민족회의의 과오에 대한 기록도 승인했다. 한 세기에 걸친 남아공 흑백간의 비극적 갈등은 이렇게 해서 대화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사례에서 우리가 부러워 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그 못지않은 참담한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처벌은 있었지만 남아공과 같은 대화해의 길이 모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광주민중학살의 충격적 사건으로부터 자살로까지 몰고 간 노동자들의 혹사, 기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해야 했던 확신범들에 대한 고문에 이르기까지, 유신과 신군부 시절의 우리 현대사는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탄압의 사건들로 점철되어 왔다. 아니, 이런 가해와 피해의 참담한 역사는 한국전쟁 중에도 벌어졌고 식민지시대에도 이민족(異民族)에 의해 자행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뿐만 아니었다. 흑인을 학대한 미국에도, 잉카족을 말살한 남미에도, 아프리카며 소련, 중국 등 세계 곳곳이 이 같은 숱한 역사적 스캔들로 얼룩져 있다. 랭보는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한탄했지만, 과연 ‘상처 없는 역사’가 어디 있을 것인가.

문제는 그 상처를 어떻게 덧나지 않도록 쓰다듬고 그것을 역사 발전의 거울로 닦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이 거대한 작업으로서의 화해가 용서와 기억임을 만델라는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기억을 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무의미하고 거기서 얻을 교훈은 수행될 수 없는 것이며, 용서를 수락하지 않는다면 통합은 불가능하고 미래로의 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만델라는 그래서 모든 과오를 고해하도록 요청했고, 그것이 진실임을 확인하면 사면을 통해 화해를 청함으로써 관용의 사회를 열어나갔다. 그는 용서의 전제가 기억이며 기억의 바닥에 용서가 깔려 있음을 이해한 것이다.

▼‘용서와 기억’ 발전의 디딤돌로 ▼

심리학자 토머스 사스는 “바보는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고, 순진한 사람은 용서하고 잊어버리며, 현자는 용서하면서 잊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라면 용서는 피해자측의 몫이고 기억은 가해자측의 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화해를 요청하면서 기억이 부인되거나 기억을 되풀이하면서도 용서를 유예한다면 참된 화해란 불가능하다. 이 칼럼의 신문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30년 전의 일을 함께 기억하며 당시의 기자들과 화해를 구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동안 해왔던 문제 해소의 시도는 다시 시작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전 '문학과 지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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