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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팔 vs 이효필 ‘우정의 라이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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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팔 vs 이효필 ‘우정의 라이벌전’

입력 2003-07-26 13:43수정 2009-09-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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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만으로는 아무래도 성이 차지 않았던 걸까.

박종팔대 이효필.

이들이 이 해가 가기 전에 다시 한번 맞붙을 것 같다.

우정의 무대라 하기에는 너무나 처절했던 지난 7월 17일 장충체육관에서의 승부.

두 선수가 링에 오르는 순간부터 공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먼저 입장한 청코너의 이효필 선수가 술이 달린 노란색 가운을 걸치고 화려한 몸짓으로 객석의 환호를 유도했다. 이선수의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올라온 100여명의 응원단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반면 홍코너의 박종팔 선수는 흰 면티셔츠에 팬츠 차림으로 조용히 링 위에 올라 몸을 풀었다. 두 선수에게 꽃다발을 전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야 할 만큼 양측 팬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곧이어 ‘박종팔’ ‘이효필’을 연호하는 함성이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3시40분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효필의 오른쪽 발이 정확히 박종팔의 왼쪽 무릎 바로 윗부분에 꽂히자 90kg 가까운 체구의 박종팔이 빙그르르 도는 듯하다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격투기 경력 11승 11KO를 자랑하는 이효필이 시종 유리하게 게임을 이끌었다. 이효필의 툭 불거진 장딴지가 마치 해머처럼 상대방의 몸통을 가격하는 동안 박종팔은 좀처럼 핵주먹을 써볼 기회를 잡지 못한다.

시합 직전 선수대기실에서 박종팔은 킥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발을 쓰면 자꾸 엎으러지더라고잉.” 예상대로 박종팔이 간간이 시도한 발차기는 이효필을 위협하지 못했고 오히려 주먹이 나갈 타이밍을 놓치게 만들었다.

격투기에서는 맨발이 원칙이나 박종팔은 복싱화를 신겠다고 고집했다. 맨발로는 스텝이 잘 밟아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같은 조건에서 싸우기로 한 만큼 이효필도 가벼운 러닝화를 신었다. 신발은 이효필의 공포의 발차기 위력을 배가시켰다. 유난히 흰 박종팔의 허벅지에 금세 붉은 자국이 찍혔다. 비틀거리는 사이 이효필의 주먹이 얼굴로 날아든다. 이효필이 발차기를 시도하다 제풀에 미끄러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하지만 관중석에선 웃음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두 친구의 양보 없는 혈전이 이미 관객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1회전 3분이 한없이 길다.

결전을 이틀 앞두고 표정이 굳어 있던 두 사람. 이효필(왼쪽)과 박종팔(오른쪽)

2회전에도 박종팔이 이효필의 발차기에 당했다. 왼쪽다리 부상이 심상치 않은 듯 그의 스텝이 엉킨다. 이때 승부욕이 앞선 이효필이 쓰러진 박종팔을 가격하려 하자 순간 경기장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다행히 불상사 없이 2회전이 끝났다.

3회전부터는 복싱 감각을 회복한 박종팔이 위력적인 잽과 좌우 훅을 날리며 이효필을 공략해 점수를 번다. 90kg의 몸무게가 실린 펀치는 잠시 박종팔의 세계 챔피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몇 차례 가격당한 이효필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4회전, 이효필의 발차기 횟수가 늘어나면서 거기에 맞아 휘청거리다 간신히 로프에 몸을 기댄 박종팔에게 이효필의 오른발이 다시 날아든다. 발차기는 빗나갔지만 이로써 경기는 끝났다. 박종팔의 스태프들은 넘어진 선수에게 두 차례나 공격을 가한 이효필의 반신사적 행위에 격분했고, 박종팔은 끝내 글러브를 벗어던지고 총총히 선수대기실로 사라졌다. 이효필의 기권승. 역대 전적에서 이효필은 3전3승을 기록했다.

전남 무안(박종팔)과 해남(이효필)을 대표하는 58년 개띠 동갑내기 두 주먹이 26년 만에 재격돌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웃었다. 글러브를 벗은 지 10여년이 지나 불어난 뱃살과 늘어진 젖가슴, 둔해진 다리로 링 위에 올랐다 창피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끝내야 할 승부가 있다.

1977년 아마추어 시절 미들급의 라이벌이던 두 사람은 두 차례 맞붙어 모두 이효필이 승리했다. 그러나 이후 복싱인생은 박종팔의 승리였다. 이듬해 프로로 전향한 박종팔은 IBF슈퍼미들급 챔피언(8차 방어 후 자진 반납)과 WBA슈퍼미들급 챔피언(2차 방어 실패)에 오르며 화려한 복싱인생을 살아왔다. 반면 아마추어 신인왕 출신의 이효필은 프로로 전향한 직후 부상해 경기를 몇 번 해보지도 못하고 은퇴했다. 그후 격투기로 전향해 11전 11KO승을 기록했으나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수행 경호부장을 지냈고 현재 스포츠마케팅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복싱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었다. 그런 만큼 영원한 챔피언 박종팔과 무관의 제왕 이효필의 ‘아웅다웅 우정’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곁에서 두 사람을 지켜본 황충재씨(전 프로권투 동양챔피언)는 “그동안 티격태격했응께 사나이들이 한 번은 붙어야제” 한다.

눈만 마주치면 농담처럼 누가 더 센지를 겨루던 일이 현실로 바뀐 것은 5월1일. 박종팔 대 이효필의 라이벌전 조인식이 열리고 7월17일로 날짜를 못박자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승부는 장난이 아니랑께.” 진한 전라도 사투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몸 만들기에 돌입한 지 석 달 만에 이효필은 몸무게 20kg을, 박종팔은 7kg을 뺐다. 조인식 때만 해도 둔하던 몸에 어느새 탄력이 되살아났다.

“내가 90kg 아래로 내려가본 게 15년 만이여.” 시합 이틀 전 양재동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두드리는 박종팔의 표정에는 생기가 넘쳤다. “40대에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랑께.” 그때 잠시 친구의 연습장을 방문한 이효필이 날렵한 발차기로 샌드백을 날리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한다. 두 선수 모두 절대 5회까지 끌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이틀 후 어느 한쪽은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이번 경기로 인해 박종팔과 이효필의 26년 우정이 깨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리인 줄 알면서도 친구의 요청에 흔쾌히 링 위에 오른 것 자체가 박종팔식 우정이다. 물론 “딱 한 번만”이라고 못박았다.

드디어 세계 챔피언을 이겼다는 기쁨도 잠깐, 이효필은 “친구야, 미안허다”를 되뇐다. “킥복싱말고 정식 복싱으로 한 번 더 해볼랑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박종팔은 “그랴, 다시 한번 해보장께”를 외친다. 경기가 끝난 바로 다음날 일간스포츠와의 회견에서 10월 중 권투 재대결을 제의한 것이다. 물론 권투라고 해서 박종팔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격투기에 문외한인 그가 이번 시합에 응한 것처럼 당연히 이효필도 권투 제의를 수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은 이효필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다. “좋지라. 한쪽 눈 가리고 한 팔은 사용하지 않는 조건이라도 붙어 보장께.” 이효필은 굿데이와의 회견을 통해 박종팔 쪽에서 권투로 하자면 권투로, 킥복싱을 원하면 킥복싱으로 어떤 종목이라도 받아들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르면 10월, 늦어도 이 해가 가기 전에 두 사람의 화끈한 승부를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나이들의 승부는 한 번으로 부족했다.

주간동아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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