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잡지 '世界'에 70, 80년대 군부 독재 알린 지명관 교수

  • 입력 2003년 7월 25일 18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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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민주화운동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비하면 저는 단순히 소식을 전달한 데 불과합니다. 오히려 나라 밖에서 비판한다고 해도 숨어서 말한다는 것이 1980년 5월 광주의 희생 앞에서 너무 비열하게 느껴졌습니다.”

1970, 80년대 일본의 진보성향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韓國からの通信)’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하면서 군부 독재 정권의 인권 탄압 상황을 세계에 전한 베일 속의 칼럼니스트 ‘T·K 生’. 그가 30년 만에 얼굴을 드러냈다.

지명관(池明觀·79) 한림대 석좌 교수.

60년대에 사상계 주간을 지낸 그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그를 공부에만 매달리게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세카이’의 야스에 료스케 편집장의 권유로 73년부터 15년여간 군사 독재를 비판하고 한국인들의 민주화 열망을 세계에 전달하는 칼럼을 써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에는 해외 특파원들이 찍어온 필름, 한국에서 건너온 성명서, 소식을 모아 처절한 비극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그는 민주화운동의 선배로서 현 시국에 대해 “국민의 열망을 모아 민주화를 쟁취했던 세력이 지금 자꾸 분열의 길을 걷기보다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 주었으면 한다”며 “386세대 정치인들이 스스로 권력의 중심이 돼 적을 만들어 나간다면 복잡한 현대사회를 이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 지금 얼굴을 드러내는가.

“그동안 내가 ‘T·K 生’이라는 점은 알게 모르게 알려졌고 이를 확인하려는 기자도 여러 명 있었지만 절대 밝히지 않았다. 나도 이젠 은퇴를 앞두고 있는 데다 세카이에서도 이젠 사실을 밝히자고 권유했다.”

―‘T·K 生’이란 필명의 뜻은….

“야스에 편집장이 직접 지었다. 특별한 의미는 없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하게 된 계기는….

“‘세카이‘의 야스에 편집장 권유로 시작했다. 나는 단순한 전달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1973년 8월 김대중씨 납치사건 이후 일본 매스컴은 6개월 동안 떠들썩했다. 그러나 일본에는 한국의 민주화운동 상황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한국의 젊은이들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적이었고, 한국의 민주세력과 연대하려는 시민운동도 전개됐다.”

―일본에서 한국으로부터의 정보는 어떻게 얻었나.

“박형규 목사나 고인이 된 김관석 전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총무 등 한국 내 기독교운동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성명서 등 민주화운동 자료는 당국의 검열을 피해 외국인 선교사로부터 전달받았다. 이들은 공항 검색을 피하기 위해 성명서를 담배에 말아온 적도 있다. 독일의 선교사 폴 슈나이츠 목사는 이 과정에서 모두 10만건이 넘는 성명서 등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를 모두 복사해 놓았다. 그는 최근 이것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다.”

―일본에서의 지 교수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내가 일본에 남아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도쿄여대 교수 부임을 배려해 주었다. 나는 일본에 체류하면서 한국의 소식을 밖으로 알리고 밖의 반응을 국내에 알리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일을 했다. 세계 각지에서 보내오는 민주화운동 지원금을 한국으로 보내는 역할도 했다.”

―당국으로부터의 추적은….

“추적을 피하기 위해 원고를 보내고 나면 관련 자료를 폐기하는 등 근거를 남기지 않았다. ‘세카이’의 야스에 편집장도 원고를 받아 다시 옮겨 적은 뒤 원본을 폐기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인 선우휘(鮮于煇) 조선일보 주필은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았을 때 ‘T·K 生’이란 필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복수 인물’이라고 대답해 숨겨 줬다.”

―최근 민주화 운동세력의 정치 참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영삼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민주화 투쟁에 힘입어 탄생하고도 자기와 다른 사람은 배제하고 분열해 가는 ‘섹트주의’가 점차 심화되고 있다. 민주화 세상이 오면 다함께 하나가 돼 나라를 제대로 키워나갈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다. 진정 민주화운동을 계승하려면 국민들을 통합할 수 있는 리더십을 키워야 한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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