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성장산업 국제회의]“정부주도기업육성 구시대발상”

  • 입력 2003년 7월 24일 19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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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차세대 성장산업 국제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박경모기자
노무현 대통령이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차세대 성장산업 국제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박경모기자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개막된 ‘차세대 성장산업 국제회의’는 몇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우선 국내외 참석자들의 ‘화려한 경력’이 눈길을 끌었다. ‘메가트렌드’ ‘글로벌 패러독스’ 등의 저자인 미국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나 ‘신(新)국부론’의 저자인 프랑스 기 소르망, 기술혁신이론을 내놓은 폴 로머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 등은 국내에서도 상당히 널리 알려진 명사들이다. 》

특히 이번 회의는 최근 한국이 국민소득 ‘1만달러의 덫’에서 주저앉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이 커진 상태에서 열려 시기적으로도 적잖은 의미를 지녔다.

한국 정부 초청으로 이번 회의에 참석한 17명의 해외 석학(해외 거주 한국학자 2명 포함)은 ‘한국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기업가 정신 고양(高揚)과 반(反)기업 정서 극복=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기조연설에서 ‘절체절명’ ‘마지막 기회’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심각한 전환기를 맞은 한국의 위기를 드러냈다.

참석자들도 새로운 도약을 위한 한국경제의 우선 과제로 기업가 정신을 꼽았다.

나이스비트씨는 “한국은 인터넷 산업에서 경험했듯이 기업가의 힘으로 상향식 경제 활성화가 이뤄져야 한다”며 정부 개입 축소와 기업가 정신을 주문했다.

그는 또 “공공 부문의 사유화(민영화)는 21세기의 가장 거대한 경제 흐름”이라며 “사유화는 고통이 수반되지만 장기적인 이익이 단기적 고통보다 크므로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소르망씨는 “시장경제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나은 시스템”이라고 평가한 뒤 “한국은 시장경제를 바꿀 것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 내부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로머 교수도 “유망 산업이나 기업을 정부 주도로 육성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며 “미국의 경우 (정부 입김이 강한) 항공산업이 매우 효율적이고 경쟁력이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최근 많은 항공사가 도산했다”고 말했다.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일하기도 했던 미국 조지워싱턴대 박윤식(朴允植) 교수는 한국사회의 반(反)기업 정서와 노동운동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했다.

박 교수는 “호전적인 노동조합과 불법 파업은 한국의 준법정신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무노동 무임금, 노동시장의 유연성, 불법파업 근절 등을 통해 노동부문의 현대화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한국 정부는 기업들이 투자, 경쟁, 혁신에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공정거래 등 법의 확립과 수송, 주택, 교육 환경 등 인프라 개선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교육과 인재 육성=참석자들은 교육과 인재 육성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소르망씨는 “성장의 핵심 동력은 교육과 문화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나이스비트씨는 “인적 자원의 질과 양이 경제 성장의 주요 요인”이라며 “기술 교육을 지원하고 경쟁력 있는 자본시장 및 노동시장과 연계해야 한국이 다음 세기의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컴퓨터와 시인(computers and poets)’이 공존해야 한다”며 기술 교육과 함께 인간성을 잃지 말 것도 권고했다.

폐쇄적인 한국 교육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나이스비트씨는 “한국은 해외 인재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적극 유치하는 데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품과 문화의 결합=소르망씨는 “해외로 수출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한국의 문화적 부가가치를 덧붙여야 한다”며 “문화가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문화의 창조 주체는 정부나 기업이 아니라 예술가이기 때문에 민간 부문에서 예술인의 창작 활동과 해외 수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이스비트씨는 기술이 보편화하면서 진품 브랜드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며 ‘트레이드(trade)마크’ 대신 ‘트러스트(trust)마크’라는 용어를 강조했다.

단순히 생산자를 알려주는 트레이드마크 대신 소비자의 믿음과 감정을 상표에 연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차세대 성장산업에 대한 추천도 이어졌다.

장클로드 베르텔레미 파리1대학 교수는 “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문화, 레저, 의료, 의약품 등의 수요가 늘고 있으며 한국이 주력할 만한 분야”라고 말했다.

니시 요시오 스탠퍼드대 나노연구소장은 “PC산업보다 통신과 인터넷 산업에 주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이 후발주자에서 기술선도국으로 바뀌기 위한 방안으로 △기술상황에 대한 빠른 판단과 수행 △국제적 산학 연계 활성화 △미국 일본 의존의 탈피 △인적자원 활용의 극대화 등을 꼽았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로머 교수 “교육개혁으로 경제성장 동력 키워야”▼

이번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폴 로머 스탠퍼드대 교수는 24일 별도로 마련된 기자회견에서 “경제성장은 혁신이 이끌고 혁신의 기반은 교육”이라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한국의 성장동력을 육성하는 방안도 교육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이 20세기에 영국을 추월한 것은 교육을 통한 장기적인 생산성 향상 덕분이었다”고 분석했다. 또 “교육은 분배의 방법이며 교육을 통해 장기적으로 임금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교육제도와 관련해 “암기 위주의 낮은 기술만 가르치며 창의성과 문제해결 능력을 가르치지는 않는 것 같다”며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분석력이나 창의력을 측정하는 시험으로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대학 졸업생의 능력을 측정해 취업이나 대학원 진학의 잣대로 삼는 게 좋다”며 대학을 졸업할 때도 시험을 볼 필요가 있다는 제안도 했다.

로머 교수는 또 영어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과학 비즈니스 등 모든 분야에서 영어가 주요 언어로 자리 잡은 현실에서 영어실력이 무역 과학 공학 등 모든 분야의 경쟁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어 “지금 젊은 학생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가장 유망하다”며 “그들이 가장 유망한 사업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북한 핵문제 등 한국의 불안요인에 대해서는 “외환위기를 극복한 한국의 탄력성을 고려할 때 인재 양성에 주력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밝다”고 밝혔다.

한국의 ‘벤처 거품’ 붕괴에 대해서도 “신기술이 개발될 때마다 붐이 일고 또 거품이 생기기 마련”이라며 “다만 그 모든 현상을 혁신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로머 교수는 ‘기술혁신이론’의 창시자로 꼽힌다.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는 혁신으로 경기 사이클을 타지 않고 경제가 꾸준히 성장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왔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로스 회장 “콘텐츠산업이 2만달러시대 이끌것”▼

“훌륭한 서퍼(surfer)는 바로 눈앞에 닥친 파도만 보지 않는다. 장차 다가올 파도도 잘 살펴야 한다. 한국 경제에는 제조업에 이어 서비스 산업이 잠시 밀려오겠지만 그 다음 파도는 바로 콘텐츠 산업이다.”

차세대 성장산업을 논의하는 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방한한 미국 디지털도메인사(社)의 스콧 로스 회장은 24일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디지털도메인은 영화에 쓰이는 컴퓨터그래픽 및 특수효과 전문회사다.

영화 콘텐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전문가로 꼽히는 로스 회장은 “최근 3년간 미국의 가장 큰 수출품은 영화나 출판 등의 지적재산권 관련 상품”이라면서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대비해 지적재산권 관련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적재산권 관련 상품은 지속적으로 수입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것.

그는 한국의 디지털 기술과 고급 인력을 높이 평가했다. 디지털도메인은 올해 상반기 국내 소프트웨어 해외 마케팅회사인 KSM과 합작해 첫 해외합작법인인 ‘D2K’를 설립하기도 했다.

로스 회장은 “한국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정보기술(IT) 인프라가 구축돼 있고 질 높은 인적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디지털 콘텐츠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면서 “콘텐츠 산업을 제대로 육성하면 조만간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92년 설립된 디지털도메인은 ILM, 픽사(Pixar)와 함께 미국 영화계에서 3대 디지털 콘텐츠 제작업체로 꼽히는 회사. 이 회사의 설립에는 로스 회장 외에도 ‘터미네이터2’와 ‘타이타닉’의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함께 참여했다.

디지털도메인은 ‘타이타닉’과 ‘천국보다 아름다운’으로 98년과 99년 연속 아카데미 특수효과상을 수상했다. 또 ‘뷰티풀 마인드’ ‘트루 라이즈’ ‘아폴로13’ ‘트리플X’ 등 특수 효과로 이름난 수많은 영화의 컴퓨터 그래픽을 담당했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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