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쾌도난담]결혼전에 굶으라구?… 영화 싱글즈 vs 처녀들의…

  • 입력 2003년 7월 24일 16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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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하정규 손희정 성지현씨. 이들은 결혼과 성을 분리하자는 주장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성과 사랑을 분리하는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위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하정규 손희정 성지현씨. 이들은 결혼과 성을 분리하자는 주장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성과 사랑을 분리하는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성(性) 묘사의 빗장을 푼 한국 영화’.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이 1998년 개봉된 한국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바쳤던 헌사다. 빗장이 풀린 지 5년 만에 최근 개봉된 ‘싱글즈’는 ‘처녀들…’과 다르면서도 닮았다. ‘싱글즈’에서 섹스 파트너를 수시로 바꿔 치우는 엄정화는 ‘처녀들…’의 프리섹스주의자인 강수연을 떠올리게 한다. 백마 탄 왕자를 잡지 않는 장진영은 자위로 성욕을 해결하는 김여진만큼 자립적이다. 공교롭게도 5명의 주인공 모두 스물아홉이다.

두 영화를 심상치 않게 본 싱글 남녀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성 권하는 사회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고 했다.

성지현=‘싱글즈’가 현실감이 있어 좋았다. 그 또래 직장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나 남자친구와의 에피소드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손희정=‘처녀들…’의 강수연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생리 중인데도 남자가 원하면 침대 위에 타월 깔아놓고 하자는 여자는 남자들의 판타지일 뿐이다. 강수연의 자유는 남자들을 위한 자유다.

하정규=감독은 의도적으로 강수연을 극단적인 인물로 그렸다. 강수연과 남자 친구의 관계를 보면 완전히 거꾸로다. 강수연은 자유분방하고 남자는 결혼해달라고 매달린다. 감독은 현실엔 존재하지 않지만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겉으로는 여자이지만 속은 남자인 인물을 만들어 결혼이나 성 관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자 관객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손=‘처녀들…’이 개봉될 때보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너 거미줄 칠 때 되지않았냐’와 같은 ‘싱글즈’의 성적 농담은 일상적이다.

성=결혼한 친구들은 “배란기 땐 더 땡겨” “난 한달에 몇 번밖에 안 해”와 같은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손=남자들이 섞여 있어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가장 에로틱했던 성관계 장소가 어디였냐” “도서관에서는 무협지 서가를 피하고 역사서 쪽에 가면 남의 눈에 안 띄고할 수 있다”는 등의 대화를 한다. 대부분은 허풍이지만.

영화 '싱글즈'

성=하지만 자위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남자 친구랑 잔다는 건 사랑으로 포장할 수 있지만 자위는 자기 욕망을 채운다는 느낌이 드니까.

손=그런데 왜 두 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스물아홉일까.

하=서른이 되면 기성세대로 분류돼 기존의 사회 구조에 어떻게든 끼워 맞출 수밖에 없으니까 스물아홉 때 뭔가 갈등을 겪어야 할 것 같아서?

손=언니들이 스물아홉에 몸이 아프다고들 한다. 스물아홉이 된 언니들은 신병 앓듯 몸살을 앓은 뒤 30대를 맞는다.

성=이것저것 많이 쑤시면서 살아왔으니 서른이 되면 안정된 위치에 있을 줄 알았다.

남들 보기엔 교사가 평생직장이라고 하지만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두 영화는 일종의 성장 드라마다. ‘싱글즈’의 장진영은 평범한 인물이다. 직장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애인에게도 차인다. 다시 괜찮은 남자를 만나지만 직장도 없이 미혼모가 되는 친구 엄정화에게 ‘남편’ 노릇을 해주기 위해 남자를 포기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좀 더 자립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는 거다. ‘처녀들…’의 진희경도 결혼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던 여자였지만 독립심 강한 친구들을 보며 결국 남자로부터 자립하게 되고 억압돼 있던 성의식을 깨달으며 자유를 느끼게 된다.

●성과 결혼과 아이

손=‘싱글즈’에서 장진영을 따라다니는 증권맨 김주혁은 그만하면 백마 탄 왕자 아닌가? 뉴욕으로 떠나면서 장진영에게 같이 가서 공부하자고 한다. 매달 1000만원 벌어다 주면 집에 들어앉을 거냐고도 하고. 미국 데려가 줘, 학비 대줘, 월 1000만원씩 벌어다 줘, 나 같으면 간다.

성=사회는 싱글들을 차별한다. 학교에서 공무원 임대주택 신청할 때도 배우자가 있어야 된단다.

손=남자도 결혼 안하면 승진 못한다더라.

하=우리나라에선 어느 나이가 되면 뭘 해야 한다는 게 있다. 네 나이면 지금 결혼해도 애가 대학 갈 때쯤이면 60이 다 되겠다 하는 식이다.

성=나이가 찼는데 결혼 안 하면 ‘너는 대단한 주의, 주장이 있느냐’고 한다.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

하=여자들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결혼한다. 안정적 성관계, 경제적 안정, 그리고 아이. ‘처녀들…’은 이것들을 분리시켜 보라고 권했다.

성=결혼과 성을 연결짓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주변에 선본 지 3개월 만에 결혼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8년째 연애 중인 여자한테 ‘어떻게 결혼도 안 한 여자가 남자와뽀뽀할 수 있느냐’고 하더라. 결혼 안의 성은 너무나 당연하고….

손=사랑과 성도 분리될 수 있을까. 친구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잔다고 해도 비난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도 그럴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하=엄정화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범수랑 동거하다 우연히 하룻밤 자고 아이를 갖게 된다. 이범수는 그것도 모르고 집을 떠난다. 엄정화는 ‘내 애니까’라며 혼자 낳아 키우겠다고 선언한다. 정말 페미니스트적이다. 성적 자유나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모성을 지키기 위해 호적상의 문제라든가 주위 시선을 이겨낸다는 건 대단히 힘든 일이다.

손=장진영이 아빠 노릇 하겠다고 나선다. 남자가 배제된 상태에서 가족이 만들어지는게 관객들에겐 불편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자 둘이 사는 게 비현실적인가.

성=결혼하면 시댁과의 관계나 육아 문제로 여자가 손해 보게 된다. 여자끼리 살면 가정의 안락함을 누리면서 가족제도가 주는 스트레스는 받지 않으니 좋을 것 같다.

●성 권하는 사회

성=‘처녀들…’에서 강수연은 유부남과 자다가 간통죄로 피소되고 사업에도 실패한다. ‘언제부터 검사들이 내 아랫도리를 관리해 온 거니. 국가 보안법이면 몰라, 간통이 뭐야 간통이’ 하며 파리로 떠나기로 한다. ‘정치적 망명’이라며 ‘조국이 해방’되는 날 오겠다고….

하=조국 해방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우리 사회를 이루는 기초가 결혼인데 이게 무너지면 안 된다.

손=조국이 해방되길 원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기 욕망대로 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유부남이랑 자는 건 아니다.

성=바람 권하는 사회다.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 얘기지만.

하=경제력이 있다고 다 바람피우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보수적이다. 남자들이 여자보다 성욕은 강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성적으로 수동적일 수 있다. 두 영화에서도 남자들은 수동적 역할로 나온다. 남성이 성적 콤플렉스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여자는 적극적이고 도발적이다. 성관계에서 변화가 일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남편이 성적으로 무능하다며 아내가 이혼 소송을 제기하면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지금은 여자들이 성욕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됐다.

손=여성도 즐기자고 얘기한다. 자기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민감한 부분을 발견해 남자친구에게 가르쳐주라고.

성=그것이 여성을 위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여성 좌파들이 프리섹스 해야지 하고 뛰어들었다가 상처를 많이 받았다. 성도 친밀한 관계와 결합돼야 의미를 갖는다.

하=과거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성의 절대적 빈곤에 처해 있었다면 지금은 상대적 빈곤이다. 대중 매체들이 성을 추구해야 하는 것처럼 몰고 간다. 그걸 보는 사람들은 손해 보는 느낌이다.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상대적으로 빈곤감을 느끼는 것이다.

▼쾌도난담 참석자 명단▼

손희정(27·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화예술학 이론석사과정)

성지현(30·초등학교 교사)

하정규(35·외교통상부 서기관)

정리=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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