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리처드 워커 前주한미국대사

  • 입력 2003년 7월 23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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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8월 12일 청와대에서 리처드 워커 주한 미국대사(오른쪽)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장을 제정받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81년 8월 12일 청와대에서 리처드 워커 주한 미국대사(오른쪽)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장을 제정받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2일 타계한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 대사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생생하게 지켜본 증인이었다. 고인의 재임 기간(81년 8월∼86년 11월)은 암울했던 5공화국을 거치며 한국사회의 민주화 열망이 움트는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집권기의 내밀한 비사(秘史)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긴장과 위기로 점철됐던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 98년 출간한 ‘한국의 추억’에서 “전두환씨는 김대중(金大中)씨의 감형을 조건으로 로널드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고 증언, 주목을 끌기도 했다.

고인의 타계 소식이 안타까운 것은 그가 한국 현대사에 깊이 관여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홍구(李洪九) 전 국무총리는 “고인은 한국을 그냥 사랑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잘 이해했던 사람”이라며 “특히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레이건 전 대통령과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등 많은 공화당 원로에게 한국을 이해시키는 데 공헌했다”고 말했다.

이 전 총리는 “미국 예일대 선배였던 고인이 한 달 전만 해도 한국을 아끼고 걱정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고, 또 건강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하겠다”며 “고인이 세상을 떠난 것은 우리나라로서는 큰 손실”이라고 애석해 했다.

고인과 형제처럼 가깝게 지낸 조동하(趙東河) 전 국토통일원 교육홍보실장은 “워커 전 대사는 전 대통령 집권 초기에 글라이스틴 전 대사와 위컴 8군 사령관 등의 기존 라인이 얼어붙게 만들었던 한미관계를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에 공헌했던 그는 다섯 군데의 대사직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는 제안을 받고 한국을 선택했다”고 증언했다.

고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을 준비 중인 그는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출신인 고인은 중국의 대숙청으로 수백만명이 죽었다는 논문을 발표한 뒤 진보적 풍토의 예일대를 떠나 사우스캐롤라이나대로 자리를 옮겼다”고 회고했다.

김승연(金昇淵) 한화그룹 회장은 한국 경제계와도 깊은 인연을 맺은 고인의 80회 생일을 맞아 지난해 4월 서울 중구 소공동 프라자호텔에서 팔순잔치를 열어주기도 했다. 이는 김 회장의 부친인 김종희 선대 회장이 워커 대사의 60세 생일잔치를 한국식 환갑잔치로 열어주기로 약속했다가 고인의 환갑을 1년 앞둔 81년 별세하는 바람에 못 지킨 약속을 뒤늦게 지킨 것.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벌인 가정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내 중국어에 능통했다. 그는 이를 토대로 2차대전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서 통역을 맡는 등 중국 전문가로 활동했다. 그는 예일대 교수 시절 중국의 대숙청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가 논란이 일자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으로 옮긴 일화도 있다.

한편 정부는 고인이 한미관계 발전에 기울였던 노력을 고려해 조전(弔電)을 보낼 계획이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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