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제2부 1장 기업①-그룹 비서실

  • 입력 2003년 7월 20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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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실 또는 기획조정실의 후신인 구조조정본부의 본부장들이 1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에 대해 논의한 뒤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부터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정순원 현대차 기획총괄본부장, 강유식 LG구조조정본부장, 김대환 인수위 경제 2분과 간사, 김종선 한진 구조조정본부장, 민충식 SK구조본 전무(이상 당시 직함). -동아일보 자료사진
비서실 또는 기획조정실의 후신인 구조조정본부의 본부장들이 1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에 대해 논의한 뒤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부터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정순원 현대차 기획총괄본부장, 강유식 LG구조조정본부장, 김대환 인수위 경제 2분과 간사, 김종선 한진 구조조정본부장, 민충식 SK구조본 전무(이상 당시 직함). -동아일보 자료사진
《‘인간포석-인사의 세계’는 21일부터 제2부 ‘사람과 자리’를 시작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어떤 자리도 그 사람 하기 나름이란 얘기도 있습니다. 인사의 세계에서 ‘자리’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이를 위해 우선 기업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기업은 관료사회를 포함해 다른 어떤 분야보다 일찍 체계적이고 선진적인 인사 시스템을 도입한 곳입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한 사람을 육성하는 데는 그가 실패한 투자경험까지 포함해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의 비용이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제2부 1장 ‘기업’ 편에선 기업 인사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자리’가 갖는 다양한 의미를 15회에 걸쳐 짚어 나갈 것입니다. 편집자》

1994년 당시 삼성그룹의 현명관(玄明官·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비서실장은 고민에 빠졌다.

그룹의 인사체계를 총괄할 인사팀장을 데려오기 위해 계열사 인사담당자들을 물색해 보니 삼성전자의 이우희(李又熙) 인사팀장이 적격으로 꼽혔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이건희(李健熙) 회장과 비슷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알아보니 두 사람은 먼 친척 관계였다.

현 실장은 이 회장에게 이 팀장이 적임자라고 보고하면서 “다만…” 하고 그 이야기를 꺼냈다. 이 회장은 가만히 듣더니 “비서실에서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하세요”라고 했다.

현 부회장은 “삼성에서는 회장의 친인척이라는 것이 대부분 핸디캡으로 작용했다. 그러니 주변의 오해를 받을까봐 이 팀장의 임명을 망설였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이 비서실의 공평무사(公平無私)함을 믿어줬기 때문에 필요한 사람들을 데려다 쓸 수 있었다는 것. 삼성 사람들은 “비서실에 대한 이 회장의 신뢰는 태산처럼 굳건하다”고 말했다. 자연히 비서실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막강 비서실=그룹 안에서 비서실은 한때 ‘무소불위’라는 말을 들을 만큼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다. 그룹마다 비서실(삼성), 회장실(LG), 경영기획실(SK), 종합기획실(현대), 기획조정실(롯데) 등 이름이 다르고 계열사들에 대한 영향력에서도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계열사들의 사업이나 투자 등을 조정하고 그룹 전체의 기획 재무 인사 감사 등을 담당한다는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대부분 구조조정본부(구조본)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비서실이 얼마나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 하나.

1975년 6월 말. 월급을 현금으로 봉투에 넣어 주던 시절이었다. 삼성그룹에도 상반기 보너스가 나와 모두들 흐뭇해했다. 그런데 비서실에는 1인당 1개가 아니라 2개의 봉투가 돌아갔다. 당시 비서실에 있던 A씨는 “집사람 모르게 술값이나 하라고 준 것 같았는데 지금 기억하기로 액수가 상당했다”고 회고했다.

비서실 출신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항상 먼저 과장 부장에 오르고 임원으로 승진했다. 비서실 출신이 승승장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또 비서실에서 고생하고 나면 그만큼 ‘특혜’를 받는다는 사실을 그룹 내외에 과시하는 의미도 있다.

현재 그룹 구조본에 있는 B씨는 “구조본 출신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페이퍼 워크(문서작성능력)에 뛰어나다. 또 구조본에서 같이 일한 사람이 하나같이 ‘잘난 사람들’이라 나중에 그룹 어디서 만나더라도 협조가 잘 이뤄져 일이 잘 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인맥이 형성된다는 말이다.

여기에다 그룹 총수와 지근 거리에서 일하다 보니 총수와 접촉하고 직접 평가받으면서 강한 인상을 남길 기회가 많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CEO가 된 비서실 출신들=1994년부터 98년까지 LG그룹 회장실에 근무했던 심재혁(沈載赫) 인터컨티넨탈호텔(한무개발) 사장은 “회장실에 있으면 기업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도 깊이,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룹비서실을 거친 사람들 중에서 CEO가 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삼성은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을 비롯해 김순택(金淳澤) 삼성SDI 사장, 황영기(黃永基) 삼성증권 사장, 유석렬(柳錫烈) 삼성카드 사장 등 49명의 주요 관계사 사장 가운데 20명 정도가 비서실 출신이다.

LG에서 회장실을 거친 CEO는 서경석(徐京錫) LG투자증권 사장, 남용(南鏞) LG텔레콤 사장, 김종은(金鍾殷) LG전자 정보통신사업본부 사장 등 6명.

한국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으로 꼽히는 손길승(孫吉丞) SK그룹 회장도 경영기획실 출신이다. 손 회장은 1978년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을 시작으로 무려 10년 이상 실장을 했고 계열사 대표로 있다가 1998년 다시 구조조정본부장이 되는 등 SK경영기획실의 역사와 함께했다. 워낙 오랫동안 그 일을 하다보니 ‘직업이 경영기획실장’이란 말을 들을 정도였다. 이 밖에 김창근(金昌根) SK㈜ 사장, 표문수(表文洙) SK텔레콤 사장이 경영기획실을 거쳤다.

현대는 김재수(金在洙) 경영전략팀 사장, 이계안(李啓安) 현대캐피탈 회장 등이 종합기획실 출신이다.

▽새로운 파워집단의 등장=비서실 출신들이 잘나가던 상황은 최근 들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우선 그룹이 아닌 기업별 경영으로 전환되면서 비서실의 후신인 그룹 구조본 자체가 사라지는 곳이 적지 않다. LG는 올 들어 지주회사 체제로 바뀌면서 구조본을 해체하고 정도경영팀을 만들었다. SK도 구조본을 해체하고 사실상 지주회사격인 SK㈜ 안에 투자회사 관리실을 두었다. 구조본과 비슷한 기능을 하긴 하지만 역시 예전만큼 포괄적이고 강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둘째는 CEO들의 전문화 바람이다. 특히 이공계와 금융 분야에서 전문성이 강한 CEO들이 늘고 있다. 현명관 부회장은 “과거에는 기획력이 강한 비서실 출신이 CEO가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앞으로는 기술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기술을 아는 테크노 CEO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삼성전자사장 10명 가운데 6명, LG화학 사장 3명 전원, LG전자 사장 7명 중 5명이 이공계 출신이다.

삼성 비서실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다른 회사 CEO가 된 C씨는 “예전에는 물건을 만들면 대개 팔렸다. 사업권 판매권을 따는 것이 경영의 핵심이었다. 회사의 가장 중요한 일은 관리 또는 위기관리였고 이에 능한 비서실 출신들이 중용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 지원 업무보다는 회사의 이익을 직접 창출하는 일이 핵심 과제가 되면서 기술개발 영업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점점 절실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요 그룹 비서실-기조실 출신 CEO들
그룹명CEO나이현직
삼성이학수57구조조정본부장
한용외56삼성전자 디지털어플라이언스네트워크 총괄 사장
김순택54삼성SDI 사장
송용로58삼성코닝 사장
김인54삼성SDS 사장
김징완57삼성중공업 사장
고홍식56삼성종합화학 사장
이재환55삼성BP화학 사장
배호원53삼성생명 사장
유석렬53삼성카드 사장
황영기51삼성증권 사장
배종렬60삼성물산 사장
배동만59제일기획 사장
양인모63삼성엔지니어링 부회장
이우희56에스원 사장
정준명58일본 본사 사장
이형도60중국 본사 회장
이상현53중국 본사 사장
LG서경석56LG투자증권 사장
남용55LG텔레콤 사장
김종은54LG전자 정보통신사업본부 사장
심재혁56한무개발 사장
김갑렬55LG건설 사장
이종석51LG카드 사장
SK손길승62SK 회장
김창근53SK㈜ 사장
표문수50SK텔레콤 사장
자료:각 그룹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변화하는 비서실▼

“종합조정실을 없앤다던데….”

97년 말 효성그룹 직원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기업들의 분위기가 흉흉할 때였다. 차츰 전략본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략본부 인원은 종합조정실 때보다 20명 정도 줄었다. 구조조정 업무는 사업부별로 책임지고, 전략본부는 철저하게 거시전략과 기획을 책임지는 브레인들로 채워졌다.

효성은 시작일 뿐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각 그룹의 비서실이나 기획조정실은 커다란 전환기를 맞는다. 정부가 경제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낡은 재벌식 경영’을 지목하면서 그 핵심 역할을 하던 비서실을 폐지하도록 강력히 유도했기 때문.

이들 중 일부는 구조조정본부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기도 했지만 ‘구조조정이 끝났는데 왜 조직을 유지하느냐’는 성가신 질책이 지금까지 끊이질 않고 있다. 정부의 주문대로 그룹이 아닌 기업별 자율경영으로 전환하면서 비서실의 후신인 그룹 구조본 자체가 사라지는 곳도 적지 않다.

LG는 올 들어 지주회사 체제가 되면서 구조본을 해체하고 정도경영팀을 만들었고, SK도 구조본을 해체하고 지주회사 격인 SK㈜ 안에 투자회사관리실을 두었다. 구조본과 비슷한 기능들이 남아 있지만 역시 예전만큼 포괄적이고 강한 힘을 발휘하진 못한다.

각 계열사의 자율권은 최대한 존중하는 대신 전략 수립과 조정에 치중하는 역할로 바뀌고 있는 것. 과거처럼 기획은 물론 회계, 재무, 매각, 분사, 인력 등 다양한 업무를 꿰뚫는 인재들이 대거 포진해 있지도 않다.

효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신사업 진출이나 투자 결정도 최대한 사업부별로 추진하고, 사업부별로 추진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큰 협상이나 정보, 네트워크 능력이 필요한 부분에서만 비서실, 기조실, 구조본 등이 나서는 추세”라고 말했다.

금호그룹은 올 초 비서실 명칭을 비전경영실에서 전략경영본부로 바꿨다. 이름은 거창해진 듯하지만 조직은 가벼워졌다. 부서는 6개에서 5개로, 인원은 50명에서 30명으로 줄었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이를 두고 “전략 수립 쪽에 중점을 둔 개편”이라고 말했다.

동부그룹은 2001년 ㈜동부를 설립하면서 “그룹의 경영 컨설팅 기능을 갖춘 지주회사로 키워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성 비서실 출신으로 효성 계열사에서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이명환(李明煥) 부회장이 ㈜동부를 이끌고 있는 것도 기획조정능력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렇게 축소된 그룹 비서실의 기능 중 대부분은 개별기업의 기획부서로 옮겨갔다.

세상이 바뀌어도 기업에서 기획 및 조정 기능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기능이 어디 있는 어떤 조직에 의해 수행되든, 그리고 그 조직이 무슨 이름을 갖고 있든….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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