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하이쿠 시인 마유즈미 마도카 '한국 종단기' 번역 출간

  • 입력 2003년 7월 17일 18시 35분


코멘트
마유즈미씨의 여정에는 하이쿠가 늘 동반했다. 그는 하이쿠안에 한국의 정취와 미소를 담아냈다. -사진제공 요미우리신문사
마유즈미씨의 여정에는 하이쿠가 늘 동반했다. 그는 하이쿠안에 한국의 정취와 미소를 담아냈다. -사진제공 요미우리신문사
2001년 8월 하이쿠(俳句·일본의 17자로된 정형시) 시인 마유즈미 마도카는 한국 지도와 한국어 회화책, 시집 한 권을 배낭에 챙겨 넣었다.

낙동강 강바람에 모자가 날아가 버리거나, 잡초 뽑는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어보기도 하면서 마유즈미씨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약 500km에 이르는 길을 걸어서 종단했다. 오랜 세월 나그네의 기억을 이어받아 온 길은 새로운 길손에게 말을 걸어왔다.

‘한국 하이쿠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에 연재됐던 글을 묶은 ‘사랑해요’(원제 Saran He Yo)가 최근 ‘걸었다 노래했다 그리고 사랑했다’(아침바다)로 번역 출간됐다. 마유즈미씨가 쓴 한국 종단기와 여행길에서 태어난 하이쿠가 풍요롭게 담긴 책이다.

마유즈미씨는 여성을 위한 하이쿠 전문 잡지 ‘월간 햅번’ 대표로 시대감각에 맞는 새로운 하이쿠를 선보이는 등 개성 넘치는 작품 활동을 펼쳐 일본에서 주목받는 시인. 요즘엔 NHK 교육방송의 ‘안녕하십니까, 한글 강좌’에도 출연하고 있다.

그는 1999년 일한문화교류회의 회원이 되면서 한국에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웃 나라와 그곳 사람들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 일본어로 번역된 미당 서정주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접했다.

‘…연꽃/만나러 가는/바람 아니라/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엊그제/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한두철 전/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이 시에 매료된 마유즈미씨는 불쑥 한국을 찾았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등으로 반일감정이 높았던 시절 마유즈미씨는 무거운 마음으로 부산역에 첫발을 내디뎠다.

걱정과 달리 여정에서 만난 한국인들이 나눠 준 정은 깊고 진했다. 생면부지인 낯선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지고, 나무 그늘에서 쉬는 할아버지에게 느닷없이 일제강점기에 대해 묻기도 했다. 길을 묻다가 차나 식사 대접을 받은 일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한국인들은 저 유명한 새빨간 고추처럼 정열적이고, 무궁화처럼 잘 참고, 온돌처럼 따뜻했다. 버릇없는 나그네를 꾹 참고 받아들여 주었고, 항상 다정하게 보내주었다.’

길 위에서 마유즈미씨는 한국의 작가들과도 교유했다. 고은 시인은 와인을 건네며 격려했다. 버스터미널에서 그는, 인생에서 단 한 번 지은 시라며 소설가 이청준이 직접 적어준 ‘고향길’을 문득 떠올리기도 했다.

마유즈미씨는 이 땅에서 맺은 귀한 인연을 58수의 하이쿠에 담았다.

‘초가을 바람 해변으로 밀려난 조가비’(부산 해운대), ‘고색창연한 서라벌을 감싸는 갈 벌레 소리’(경주 불국사), ‘눈싸움하듯 한글과 눈뭉치를 던지고 있네’(낙동강), ‘흐드러지게 칡꽃 내음 풍기는 정겨운 한국’(충북 수안보).

마유즈미씨는 ‘왜 걷는가’라는 질문이 ‘왜 하이쿠를 읊는가’라는 의문과 통한다고 말한다. 한 송이 제비꽃을 발견하거나, 한국의 대지에 뿌리 내린 아름드리 나무 그늘에서 한줄기 서늘한 바람을 즐길 때, 하늘은 걷는 나그네에게만 선물을 준다. 하이쿠 또한 그런 순간에 태어난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