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정희/'판도라의 상자' 열어라

  • 입력 2003년 7월 15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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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어 산이라더니 노무현 정부의 갈 길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첩첩산중에 날은 어두워지는데 불빛마저 보이지 않는 형국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북한의 핵무기 개발 조짐 소식으로부터 유괴, 납치 등 강력 범죄 증가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반가운 소식 하나 건지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 어느 민족종교 대표자가 노무현 정부는 초년고생을 거쳐 후반에는 잘 풀려나갈 운명이라는 덕담 아닌 덕담을 했다는데, 그 말이라도 믿어 보고 싶은 심정이다.

▼‘대선자금’ 정국전환 이용 안돼 ▼

현재 정치권의 폭풍의 눈으로 다가오고 있는 대선자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노무현 정부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대철 민주당 대표의 대선자금 발언을 계기로 의혹과 책임 공방이 증폭되더니, 희망돼지저금통의 모금 액수마저도 거짓 선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국민의 실망이 커지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여야 모두 대선자금을 소상히 밝혀 검증받자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이 돌파구가 될 수는 있을 듯하다. 이는 지난 대선이 정치사상 유례없는 깨끗한 선거였다는 자신감의 표출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번 대선자금 문제를 여야의 문제나 민주당내 신당파와 비주류, 청와대와 정 대표, 혹은 정치권과 검찰의 대결로 치환해 그들 사이의 타협 정도로 풀어나가려 한다면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할 따름이다. 정 대표를 비롯한 몇몇 정치인들을 희생양 아닌 희생양으로 삼아 문제를 축소하려 한다거나, 현행 정치자금제도의 탓으로 돌려 사태를 호도하려 한다면 이는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국민이 노무현 정부의 출범 이후 몇 개월 안 되는 기간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보면서도 그래도 참여정부는 과거 정부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이 정부가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대북 송금 문제나 노동, 재벌정책에 대해 국민 사이에 갈등을 빚는 견해가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투명한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여망은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여부에 상관없이 한결같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대선자금 문제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정면 돌파로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것이 노 대통령의 장기 아니었던가.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대선자금 문제로 기존 정치권을 흔들어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권의 새로운 밑그림을 그리고, 정계개편을 통해 내년 총선을 겨냥하는 수준의 정국 전환을 의도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해 대선자금 문제뿐 아니라 정치자금 전반의 문제, 정경유착과 정치부패 문제, 나아가 정치인들의 의식 전환에 이르기까지 정치문화와 제도적 차원의 근본적 개혁을 이끌어내야 한다. 정국 전환을 위한 정면 돌파가 아니라 한국정치의 방향을 바로잡는, 그리하여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정치로 전환하기 위한 정면 돌파가 절실하다.

▼양심고백-진상규명 선행돼야 ▼

이를 위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이미 불거진 대선자금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이다. 모든 것을 밝히면 정치권이 공황에 빠질 것이기에 적당한 수준에서 덮어야 한다는 일면 협박성, 일면 동정 유발성 발언에 국민은 더 이상 속지 않는다. 투명하게 밝히지 않고서는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노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과 여야 정치권은 양심고백을 통해 대선자금이 어떻게 조달되고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스스로 밝히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검찰 또한 성역 없는 수사에 나서 국민의 검찰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중앙선관위도 허위, 부실 신고를 밝혀내고 정확한 대선자금 수급명세를 도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모든 것이 밝혀지면 당사자들은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 뒤 비현실적인 제도를 바꾸는 순서를 밟아야 한다. 화를 복으로,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와 결단으로 이제 초년고생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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