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백진현/北核대응 미루지 말라

  • 입력 2003년 7월 14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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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폐연료봉 8000여개의 재처리를 완료했다고 미국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폐연료봉 재처리 작업은 핵폭탄 제조의 핵심 단계로 그동안 북한이 넘어서는 안 될 금지선(Red Line)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 핵문제는 이제 정말 심각한 위기국면에 진입한 셈이다. 물론 북한 말만 듣고 이를 기정사실화하기는 어렵지만 현명한 정책결정자라면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응전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韓美 이상할 정도로 의연 ▼

작년 10월 북핵 문제가 처음 터진 후 9개월이 지났다. 지난 9개월을 되돌아보면 뭔가 답답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끊임없이 도발을 계속해 대는 북한에 대해서도 지치지 않을 수 없지만, 북한이 핵무기 개발의 문턱까지 오도록 한국과 미국 당국은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핵개발을 용인하지 않으며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원칙은 천명했지만, 이 원칙을 과연 어떻게 실현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또 이 두 원칙이 충돌할 때, 즉 북한이 끝내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에 대해 한미 양국이 솔직한 논의를 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양국의 실무진이 그럴싸한 단계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든 로드맵을 놓고 토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이 시나리오대로 가지 않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속 깊은 의견 교환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굳이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골치 아픈 논의를 미리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핵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뒤로 미루기 어려운 상황에 다다랐다. 더 늦기 전에 한미 양국은 각종 돌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응책을 준비해야 한다. 가령 ‘금지선’ 문제만 해도 그렇다. 금지선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어디가 금지선이며, 북한이 이 선을 넘을 경우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에 대해 한미 양국간에 분명한 사전 합의가 있어야 한다. 선이 어디인지도 분명치 않고, 선을 위반했을 때 어떤 제재가 있을 것인지도 불확실할 경우 금지선은 억제 효과를 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한미간 갈등만 증폭시킬 소지가 높다.

5월 한미 양국이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추가조치’ 문제도 마찬가지다. 추가조치가 효과를 내려면 한미 양국이 언제, 어떻게 추가조치를 발동할 것인지에 대해 사전에 분명하고 구체적인 합의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추가조치는 기대했던 억제 효과는커녕 한미간 갈등요인이 될 우려가 높다.

북한이 폐연료봉 재처리를 완료했다고 스스로 선언했는데도 한미 양국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의연하다. 이런 식의 북한의 협박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새삼 놀랄 일도 아닐지 모른다. 또 북한의 도발에 당황하거나 과민반응하기보다는 의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의연한 대응이 치밀한 전략에 따른 것이 아니라 뾰족한 수가 없거나 한미간 공동 전략의 부재에서 나온 궁여지책이라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북핵 문제는 한편으로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보, 다른 한편으로는 한미동맹의 장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도전이다. 우리의 목표는 물론 북한의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 한반도의 안전을 유지하고, 이 과정에서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미 양국이 북핵 문제에 대해 깊이 있고 솔직한 논의를 통해 구체적인 공동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렵고 불편한 현실은 외면하고 서로에게 무난한 일반적 원칙만 반복하는 것이 공동전략은 아니다.

▼ ‘추가조치’ 등 분명한 계획을 ▼

미국과 유럽은 이라크사태의 평화적 해결에 결국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대서양동맹은 회복하기 어려운 큰 손상을 입었다. 누구도 이러한 상황이 한반도에서 반복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평화적 해결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평화적 해결을 가능케 할 현실적 공동 전략이 있어야 한다.

백진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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