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칼럼]BBC와 KBS

  • 입력 2003년 7월 11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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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를 세계적인 공영방송인 영국의 BBC와 1 대 1로 비교한다는 것이 당치도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자꾸 비교하고 싶어지는 것은 그들이 부럽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연주 사장이 취임한 이후 KBS에 대한 불안한 시각이 증폭되는 때여서 더욱 그렇다.

똑같이 국민의 시청료로 운영되면서도 KBS와 BBC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마디로 ‘독립성’과 ‘객관성’의 격차다. ‘정권의 시녀’라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던 KBS와는 달리 BBC는 정권과 정면 대결도 불사할 만큼 독립성을 갖고 있다. 객관성에서도 ‘BBC는 믿을 수 있다’는 인식을 영국인의 뇌리에 확고히 심어 놓았다.

▼같은 공영이지만 비교안돼 ▼

요즘 영국에서는 BBC와 토니 블레어 정권 사이에 ‘권-언(權-言) 공방전’이 뜨겁다. 싸움의 발단은 영국 정부의 이라크전 관련 보고서다. BBC는 이를 ‘신뢰할 수 없는 문서’라고 보도했고 영국 정부는 ‘허위 보도’라며 BBC에 맹공을 퍼붓고 있다. “BBC가 야당 행세를 한다”는 극언까지 나왔다.

우리 입장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어느 쪽이 맞느냐 하는 ‘진실’보다는 BBC와 정권 간의 ‘팽팽한 긴장 관계’다. 이번 논쟁에서 BBC가 느긋한 반면, 애가 타는 쪽은 영국 정부라는 점에서 BBC의 독립성이 얼마나 탄탄한지를 알 수 있다. 영국인들이 “BBC의 위상은 여왕과 비틀스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고 말할 만큼 각별한 애정을 보내는 것은 이런 독립성에 기인한다.

이에 비하면 우리 공영방송이 걸어온 길은 정권에 예속됐던 역사였다. 역대 정권은 KBS사장에 ‘자기 사람’을 배치했고 정권이 바뀌면 방송국 내부는 새 사장에 누가 오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새 정부 들어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서동구 사장 인사 과정에 개입했으며, 정연주 사장 인사 과정에서도 청와대 개입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현실에서는 이번 BBC 사례와 같은 ‘긴장 관계’가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다.

노 대통령이 KBS를 향해 “방송이 가라는 대로 갈 것”이라며 찬사를 보낸 것은 이들 사이가 정반대로 ‘밀월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뭐가 그리 급한지 정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개혁’을 내세우며 프로그램과 사람을 온통 바꿔 버렸다.

BBC 구성원들의 사명감은 투철하다. 이들은 “우리는 영국 국민에게 봉사한다. 그것은 시청료를 받는 대가”라고 입을 모은다. 국민이 낸 시청료로 월급을 받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니 정권이 아닌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처럼 정권이 바뀌고 사장이 새로 왔다고 해서 뭔가 보여주려고 야단법석을 떠는 일이 없다. 주인이 국민이기 때문이다. 영국 국민은 이들에게 기꺼이, 그리고 흔쾌하게 시청료를 지불하면서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물론 현재 KBS의 재원은 시청료 수입이 전부가 아니다. 상당 부분이 상업광고로 충당되기 때문에 KBS도 BBC처럼 시청료 수입만으로 운영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도 KBS가 지금까지 국민이 모아준 시청료를 과연 국민을 주인으로 여기는 마음과 자세로 써 왔는지는 의문이다. KBS가 긴급시 사용되어야 할 예비비 112억원을 직원 성과급으로 나눠줬던 것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사례다.

KBS는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어느 때보다 좋은 기회를 만났다. 국민은 권력이 방송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이제 KBS의 최대 과제는 정권의 신뢰가 아닌 국민의 신뢰를 얻는 일이다. 시청료를 내는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

▼정연주 對 리스 ▼

BBC를 세계 공영방송의 대명사로 만든 일등 공신은 초대 사장인 존 리스다.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BBC의 전통을 일궈낸 인물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리스스러운’이라는 형용사가 실려 있다. 독립성 확보라는 KBS의 해묵은 과제를 풀 수 있는 좋은 시기에 취임한 정 사장도 ‘정연주스러운’이란 단어를 역사에 남길 수 있을 것인가. 그 의미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그것은 그가 KBS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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