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인간의 힘'…‘조선판 돈키호테’ 구국의 가출기

  • 입력 2003년 7월 11일 17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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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소설에서 작가 성석제는 변함없이 신념을 지켜 낸 시골양반 채동구를 통해 ‘인간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새 소설에서 작가 성석제는 변함없이 신념을 지켜 낸 시골양반 채동구를 통해 ‘인간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인간의 힘/성석제 지음/260쪽 8000원 문학과지성사

소설가 성석제(43)에게 그것은 의문이었다. ‘우리 민족의 과거는 왜 이렇게 보잘것없는가, 왜 우리 조상들은 언제나 당하기만 하고 살았는가.’

10여년 전 고향(경북 상주)에 들렀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향토 자료가 작가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옛날 시골 양반들의 삶을 이루는, 미시적이고 아름다운 단초들이 뿜어내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의 향기 때문이었다.

성석제의 네 번째 장편소설 ‘인간의 힘’은 올곧은 신념을 품은, 그러나 돈키호테를 닮은 선비 채동구의 이야기다. 채동구는 작가의 외가 쪽 조상인 오봉(五峯) 선생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주인공과 오봉의 삶과 행적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채동구는 조선 전기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채담의 후손. 열네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학업에 뜻도 겨를도 없이 세월만 흘렀다. 그렇지만 채동구는 임금과 나라 소식에 늘 관심을 기울이며 자나 깨나 자신이 양반임을 잊지 않았다.

인조 2년(1624), 평안병사 이괄의 반란이 일어났다. 의인 채동구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입던 베옷에 도포를 걸치고 짚신 바람으로 길을 나섰다. 대물림한 녹슨 환도를 든 동구가 믿는 것은 선비의 맨주먹과 가슴의 붉은 피였으나 어가 주변만 맴돌다 낙향하고 만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가출이었다.

두 번째 가출은 정묘호란 때였다. 임금 일행을 따라 죽을 고생을 해 가며 강화도에 도착한 동구. 그러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뒤였다. 장졸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임금의 영에 동구는 힘없이 발길을 돌린다. 3월 하순이 다 돼 집에 도착하자 3월 11일 강화도에서 과거를 시행해 문무관을 뽑았다는 소식이 와 있었다.

인조 14년(1636)에는 청 태종이 직접 전쟁에 나섰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임금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피한다. 친척 명선을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떠난 동구는 성 안에서 외롭게 농성하는 임금과 신하를 생각하니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굴욕적인 항복에 임금이 머리를 조아렸다는 소식을 들은 동구는 청군의 창에 찔려 죽음을 당한 명선을 생각한다. 통곡 끝에 단식에 돌입한 동구의 집은 망국을 슬퍼하는 이들의 성지가 된다.

조정이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분란을 일삼자 동구는 상소를 올린다. 상소가 빌미가 돼 그는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힌 청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간다. 청군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기개를 꺾지 않은 동구는 결국 귀향하고, 선비들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치며 백성의 신망을 받다 71세로 생을 마감한다.

초지일관해서 갈 길을 간 채동구의 신념을 통해, 작가는 사람에게 있어 무엇이 중요하며 시공을 초월해 지켜야 할 가치란 무엇인지 되짚는다. 역사의 거대한 줄기를 따라가다 보니 성석제 특유의 능청과 입담이 크게 도드라지지는 않는다.

작가는 ‘실천과 성의, 죽음을 무릅쓰고 인간된 그 무엇인가를 관철하는 것,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의 소중함이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아는’ 그런 의지를 ‘인간의 힘’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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