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종욱/고장난 외교 시스템

  • 입력 2003년 7월 10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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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당사자’ 발언으로 야기되었던 혼란은 일과성 해프닝으로 넘겨 버리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남북한과 미국 등 여러 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따라서 다자의 뜻으로 당사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대통령의 솔직한 해명이 있었지만, 이는 대통령 개인의 부적절한 용어 선택 차원을 넘어 우리 외교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韓中회담 갖가지 허점 노출 ▼

우선 회담의 형식에 대한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정리하지 못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참모들이 다자 대화에 대한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대통령은 중국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 우리의 입장을 설명만 한 채 합의 도출은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의 판단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이런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했어야 옳았다. 공동기자회견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을 사용했고, 28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발표된 공동성명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아예 한마디의 언급조차 없었다. 미국과 일본 방문에서 다자회담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이상 중국과의 정상회담에서 이를 관철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며,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두는 게 현명한 외교였을 것이다.

회담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런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용 못지않게 형식도 중요한 게 외교다. 형식 때문에 회담이 결렬된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그동안 회담의 형식을 둘러싸고 관련 당사자들 간에 심각한 이견이 존재했고, 이를 풀기 위한 줄다리기 협상이 진행되어 온 게 그간의 사정이었다. 한미일 3국의 고위 실무회담이 수차례 열렸고 결국 한미, 한일 정상회담에서 확대 다자회담으로 입장을 최종 정리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가서는 그저 설명하는 선에서 끝냈고, 게다가 나중에 다른 얘기까지 나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미국과 일본을 두둔하거나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라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신뢰가 걸린 문제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면 왜 미일 정상회담에서 합의를 했단 말인가.

형평성도 문제였다. 공동성명에는 중국의 주장이라는 꼬리표를 달긴 했지만 북한의 안보 우려가 해소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의 핵 프로그램 추진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을 흔드는 중대한 위협이라는 말은 없었다. 북한 스스로 서명한 국제적 합의를 위반했다는 말도 없었다. 마치 핵문제의 본질이 북한의 안전을 미국이 보장해 주지 않은 데 있다는 듯한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명기할 바에야 우리 주장도 함께 넣었어야 균형 잡힌 공동성명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는 기록으로 말한다지 않는가.

실무진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실무차원에서 관철하지 못한 현안을 정상회담의 의제로 넘긴 것은 정상외교의 기본에 배치되는 것이다. 실무 접촉에서 관철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으면 아예 의제에서 빼든지, 아니면 정상회담에서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 대한 대비책이라도 세웠어야 했다. 확실한 대책도 없이 정상회담의 의제로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사전에 배포한 자료에도 확대 다자회담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낼 것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최대 기대치를 적어 놓은 것이라는 해명은 외교적 아마추어리즘을 자인하는 것이다. 최대치가 아니라 최소치를 상정하는 게 정상회담의 기본이다. 기대치만 부풀려 놓아 정상회담의 성과를 폄훼하는 결과가 초래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청와대와 내각 따로 놀아 ▼

현 정부 외교안보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 청와대 정책결정조직 내에서 수직적 상하 관계가 불분명하고 부처간 수평적 협의도 원활하지 못한 것 같다. 내각과 청와대의 보좌진이 제각기 열심히 뛰고 있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각개 약진하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의 보좌기능을 효율적으로 재조정하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의 조정 역할을 강화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전문 인력을 보강해야 할 것이다.

정종욱 아주대 교수·정치학·전 駐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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