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7월 10일 17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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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길(3)

주불과 함께 설현을 떠난 항타(項타)는 곧 제왕 전담(田담)의 대군과 만나 밤낮 없이 임제(臨濟)로 달려갔다. 오래잖아 제나라와 초나라의 군사들은 임제 성밖에 이르렀다. 하지만 장함이 워낙 철통같이 성을 에워싸고 있어 성안으로 들지 못하고 성밖 들판에 진을 쳤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장함은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名將)답게 다시 한번 반진(反秦) 의군들에게 매서운 병법을 맛보였다. 성 안팎의 병력이 합쳐지게 전에 하나씩 쳐부수기로 하고 먼저 성밖의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을 한밤중에 전군을 들어 맹렬하게 들이쳤다. 장함이 자주 그래왔듯. 집중된 병력으로 분산된 적을 친다는 원리를 적용한 야습(夜襲)이었다.

장함은 먼저 성을 에워싸고 있는 군사들에게 화톳불을 요란하게 피우도록 하여 임제 성안의 위군(魏軍)들이 뛰쳐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밤이 깊기를 기다린 다음 말발굽은 헝겊으로 싸고 군사들에게는 하무[매]를 물려 소리 없이 제나라와 초나라 군사들의 진채로 다가들었다. 화톳불 가에는 많은 허수아비를 세워 대군이 그대로 성을 에워싸고 있는 양 위장한 체였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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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魏) 제(齊) 초(楚) 세 나라가 힘을 합쳤을 뿐만 아니라, 성 안팎에서 서로 의지하는 형세[기角之勢]를 이루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성밖 제초(齊楚) 연합군은 마음이 느슨해져 있었다. 등과 배로 적을 맞은 격이 된 장함이 되레 치고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무런 대비 없이 잠들어 있다가 갑작스런 야습을 받자 큰 혼란에 빠졌다.

제왕 전담의 사람됨이 용렬하지 않고 항타 또한 한 무리의 장수로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겁먹고 놀라 달아나기 바쁜 군사들을 되돌려 놓기는 어려웠다.

“서라. 달아나는 자는 모두 벤다! 적은 많지 않다”

둘 모두 칼을 뽑아들고 그렇게 외치며 놀라고 겁먹어 달아나기 바쁜 군사들을 다잡아 보려했으나 헛된 일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몰려드는 진병(秦兵)에게 한번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어지럽게 뒤엉킨 군사들 가운데서 죽고 말았다. 그들을 청해 데려온 주불도 목숨을 보전하지는 못했다. 달아나는 군사들 틈에 끼어 진채를 빠져나가다가 이름 모를 뒤쫓는 진병들의 창칼에 어육(魚肉)이 났다.

한편 화톳불과 허수아비에 속아 밤새 임제성 안에 꼼짝없이 갇혀있던 위왕(魏王) 구(咎)는 날이 밝아서야 구원을 왔던 제나라와 초나라의 군사들이 장함에게 여지없이 부수어져 흩어진걸 알았다. 주불과 전담, 항타의 목을 장대에 매달고 성벽 아래로 몰려든 진나라 군사들을 보자 더 버텨볼 마음이 사라졌다. 적장 장함을 문루 아래로 불러 소리쳤다.

“장군. 진나라에 맞선 것은 이 구(咎)일뿐, 백성들은 죄가 없소.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 전에 먼저 백성들을 내보내려 하니 죄 없는 그들은 모두 살려주시오. 그들이 일없이 흩어진 뒤라야 우리도 창칼을 놓고 항복할 수 있을 것이오. 백성들이 우리와 함께 성안에 있다가 옥과 돌이 함께 타는[玉石俱焚] 끔찍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감히 청하는 바이외다.”

장함이 그리 꽉 막힌 장수가 아니어서 그런 위구(魏咎)의 요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장졸들에게 영을 내려 잠시 에움을 풀게 함으로써 성안 백성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날 수 있게 했다.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위구는 백성들이 모두 몸을 피했다 싶자 백기를 내걸고 성문을 활짝 열어 열었다. 그러나 자신은 궁궐 삼아 살던 집에 불을 질러 함께 타 죽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아름답고도 씩씩한 출발에 비해 너무도 어이없고 끔찍한 끝을 본 위왕 구와 주불이었다. 진왕(陳王=진승)의 명을 받은 주불이 위나라 옛 땅을 진나라로부터 되찾았을 때 위나라 사람들은 주불을 받들어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또 제나라와 초나라도 각기 수레 50대를 갖추고 사신을 보내 주불을 위왕으로 맞으려 하였으나 주불은 끝내 사양했다.

“천하가 어지러우면 충신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지금 천하가 진나라에 맞서 싸우고 있으니, 도리로 보아서도 반드시 위(魏)왕실의 후예를 찾아 왕으로 받드는 게 옳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옛 위나라의 영릉군(寧陵君)이었던 구를 맞이한 뒤, 사자를 다섯 번이나 진왕에게 보내어 기어이 그를 위왕으로 세우게 하였다. 같이 진왕의 부장(部將)이면서도 스스로 조(趙)나라 왕이 된 무신(武臣)이나 연(燕)나라 왕이 된 한광(韓廣)과 견주어 보면 개결(介潔)하다는 칭송만으로는 모자랄 주불이었다.

위왕 구도 그런 주불의 추대에 부끄럽지 않게 임금 노릇을 했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 어떤 선왕(先王)보다 백성을 아끼고 위했으며, 죽음을 맞아서는 스스로를 불태워 군왕(群王)의 장렬한 기상을 보여주었다.

그때 위구의 아우인 위표(魏豹)는 흩어지는 백성들 틈에 끼어 임제성을 빠져 나온 뒤 초나라로 도망갔다. 뒷날의 얘기지만 초 회왕은 위표에게 수천의 군사를 주어 다시 위나라 땅을 되찾게 하고 나중에는 위왕이 된다. 하지만 그의 삶도 죽음도 형 구의 품격에는 아득히 미치지 못한다.

제왕 전담은 위나라를 구하러 갈 때 사촌 아우인 전영(田榮)을 장수로 데려갔다. 전담은 임제 성밖에서 장함의 야습을 받아 죽었으나 전영은 용케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추격을 벗어난 전영이 흩어져 달아나던 전담의 군사들을 수습한 뒤 동아(東阿)로 달아나자 장함이 전영을 뒤따라가서 성을 에워쌌다.

그 사이 전담이 죽었다는 소식은 제나라에도 전해졌다. 사람들은 슬픔보다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차 옛 제나라의 마지막 왕인 전건(田建)의 아우 전가(田假)를 급히 새 왕으로 세웠다. 또 왕족인 전각(田角)을 재상으로 삼고, 그 아우인 전간(田間)을 장군으로 높여 흔들리는 제나라를 안정시켰다.

그해 7월은 유난히 비가 많았다. 잇따라 사흘씩 큰비가 내려 군사를 움직이기에 좋지 않았으나 항타에게 한 갈래 군사를 주어 위나라를 구하게 한 무신군(武信君) 항량은 그 결말을 기다리지 않고 항보(亢父)로 군사를 냈다. 그런데 미처 성을 들이치기도 전에 급한 전갈이 왔다.

“위나라를 구하러 갔던 군사들이 임제(臨齊) 성밖에서 장함의 야습을 받아 크게 낭패를 보았다고 합니다. 제왕 전담과 우리 항타 장군님은 주불과 더불어 싸움터에서 죽고 군사들도 태반이 죽거나 사로잡혔습니다. 오직 제왕의 아우 전영이 한 갈래 패군(敗軍)을 수습하여 동아로 달아났는데, 장함이 그를 뒤쫓아 성을 에워싸고 들이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 기세가 하도 사나워 아침저녁을 기약하기 어려울 지경이라, 전영이 우리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에 항량은 항보를 버려두고 동아로 군사를 몰아갔다. 태어나기는 제나라 사람이지만 오래 전부터 그의 사람이 되어 사마(司馬)로 있는 용저(龍且)에게 1만 군사를 주어 먼저 달려가게 한 다음 자신도 전군을 들어 그 뒤를 받쳤다. 용저가 대쪽을 쪼개는 기세로 장함의 에움을 뚫고 성안으로 들어가 꺼져 가는 제나라 군사들의 전의를 되살려냈다. 그리고 뒤따라온 항량의 대군이 동아 성밖에 진채를 내려 안팎에서 호응하는 태세를 이루었다.

장함은 이번에도 집중해서 분산된 적을 친다는 계략을 펼쳐보려 했으나, 이미 사정이 전 같지가 않았다. 성안은 성벽이 든든하고 높은데다 용저의 구원병이 뚫고 들어가 기세가 올라 있었다. 성밖에 있는 항량의 본진은 더했다. 머릿수로도 장함의 군사보다 많은데다 아직까지 한번도 져본 적이 없는 강동(江東) 자제들이 그 골격을 이루고 있었다. 더군다나 야습은 며칠 전에 같은 적을 상대로 써먹은 수법이었다.

그래서 머뭇거리며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장함은 등과 배로 적의 대군을 맞는 격이 되고 말았다. 농민군보다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장비와 병참에서도 뛰어난 장함의 군사들이었지만 한창 부풀어 오른 항량의 군세에는 머릿수부터 모자랐다. 거기다가 제나라 사람으로서 복수심에 차있는 전영과 용저가 대군을 이끌고 성안에서 뛰쳐나올 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형세가 불리하다 해서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날 수도 없었다. 희수(戱水)를 건넌 이래로 한번도 진 적이 없는 장함의 군사들이었다. 희수 가에서 함양을 넘보던 주문(周文)의 대군을 쳐부수고, 민지(승池)에서는 마침내 주문을 죽였다. 그 뒤로도 진승의 장수들을 차례로 쳐부수고 진현(陳縣)에 이르러 그 마지막 근거를 우려 뺐으며, 쫓기던 진승의 목을 하성보(下城父)에서 얻었다. 그리고 임제에서는 위나라 제나라의 두 왕과 초나라 장수를 한꺼번에 죽인 장함의 군사들이었다.

장함이 마지못해 싸울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는데 무신군 항량이 먼저 전열(戰列)을 펼쳤다.

항우와 8천 강동 자제들을 선봉으로 삼고 종리매, 환초 항장(項壯)같은 맹장들에게도 한 갈래 군사를 주어 벌판 가득 벌여놓았다. 당양군 경포(경布), 패공 유방, 파군 오예와 포장군 같은 별장(別將)들도 각기 거느린 장졸들과 함께 좌우 날개를 이루었다.

“잔꾀를 부려 이기느니 정면으로 당당히 맞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저들의 기세를 꺾어놓는 게 나을 것이오. 듣기로 장함은 집중된 힘으로 분산된 적을 치는 계략에 능하다 했소.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적을 토막내어 흩어진 그들을 하나씩 때려잡을 것이오. 여러 장수들은 북소리와 함께 일제히 내달아 각자의 정면을 돌파하시오! 그런 다음 되돌아서 토막난 적을 포위하고, 다시 성안 군사들이 뛰쳐나와 적이 달아날 길을 끊어버린 다면 장함은 날개가 있다해도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오.”

항량이 그렇게 명을 내린 뒤 진군을 재촉하는 북을 울리게 했다. 그러자 초군(楚軍)은 대쪽을 쪼개는 기세로 장함이 거느린 진군(秦軍)의 진세를 쪼개고 들어갔다.

“모두 가운데로 모여라! 원진(圓陣)을 이루고 흩어지지 말라!”

그제야 항량의 의도를 알아차린 장함이 그렇게 급한 명을 내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한 줄로 나란히 밀고든 초군의 각 부대는 빠르고도 날카로운 화살처럼 여기저기서 진군을 관통해 버렸다. 몇 토막으로 나눠진 진군이 황급히 집중을 시도하고 있는데, 관통해 지나갔던 초군이 다시 돌아와 흩어진 그들을 점점이 에워싸고 두들겼다. 거기다가 성벽 위에서 싸움터를 내려다보고 있던 전영과 용저의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뛰쳐나오니 어지간한 장함도 벼텨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다. 징을 울려 군사를 물리게 하라. 장졸들에게 각기 서쪽으로 몸을 빼내 성양(城陽)이나 복양(복陽)으로 모이라고 이르라!”

그런 명을 내리고 자신도 말머리를 돌려 싸움터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워낙 초군이 촘촘하게 에워싸 진군의 태반은 끝내 그 싸움터를 벗어나지 못했다. 함양을 떠난 뒤로 장함이 처음 맛본 참담한 패배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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