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위안貨에 달린 아시아의 운명

  • 입력 2003년 7월 10일 16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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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시아 금융시장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그리고 그 불안의 근본에는 ‘환율’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아시아의 외환 시장에는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통화는 달러화에 고정돼 움직이는 반면 한국 등 여타 아시아 국가 통화는 엔화에 연동돼 움직이는 양극화 현상이 고착됐다. 서로 자국의 수출경쟁력을 유지해 생존하기 위한 자구책의 결과라 하겠다.

문제는 미국의 정책. 올 들어 미국 정부가 ‘강한 달러 정책’을 유지할 것을 여러 차례 천명했지만 실제 달러화는 엔, 유로 등 주요 국가 통화에 비해 절하되고 있는 실정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겉으로는 ‘강한 달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달러화의 절하를 오히려 반기는 것 같다. 달러화 절하가 미국의 누적된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적자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그들의 기대 때문인 듯하다.

이런 미국의 정책은 아시아 외환시장의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아시아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의 약세는 중국처럼 달러화에 고정돼 있는 국가들의 수출경쟁력을 높여준다. 그러나 한국처럼 엔화에 연동돼 움직이는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는 자국 화폐가 상대적으로 절상돼 수출여건이 갈수록 불리해 질 수밖에 없다.

환율이 한 국가의 경제를 어느 정도 좌우하는지는 국제외환시장의 역사와 일본 경제의 변화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전후 냉전시대 국제금융제도는 미국의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도, 즉 ‘브레튼우즈’ 체제였다.

이 제도의 최대 수혜국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자국 산업기술력에 비해 턱없이 저평가된 엔화 가치에 힘입어 전통제조업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며 빠르게 경제를 재건했다. 그러나 미국은 달러의 만성 고평가 상태로 수출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쇠퇴를 거듭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73년 ‘변동환율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킹스턴 체제’가 출범했다. 그리고 이마저 각국의 의도적인 환율 조작(Dirty Floating) 탓에 실질적인 달러화 절하가 이뤄지지 않자 1985년 서방선진5개국(G5)은 달러화를 의도적으로 절하하도록 유도하는 ‘플라자 합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엔화 가치는 1995년 한때 엔-달러 환율이 80엔 수준에 이를 정도로 급등했고 일본의 수출 경쟁력도 급격히 떨어졌다. 90년대 ‘상실의 시대’(Lost Decade)로 불리는 일본 장기 침체의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근원도 환율 문제였다. 94년 초 중국 정부는 단일환율제도를 정착시킨다는 명분으로 위안화 가치를 대폭 평가절하했다. 또 95년 일본 정부도 경기회복을 위해 빌 클린턴 정부와 시장 공동개입을 통해 엔화를 97년까지 크게 평가절하했다.

아시아의 경제대국인 중 일 양국의 의도적인 평가절하 정책이 이웃 국가들에게 큰 피해를 끼쳤다. 두 나라와 수출을 겨루던 아시아 국가들은 중, 일 양국의 환율 조정 후폭풍에 휘말리며 경제 침체를 겪었고 급기야 97년 줄줄이 외환위기를 맞게 됐다.

최근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가 자국 화폐 고평가로 고전하는 반면 중국 등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는 나라는 자국 화폐 저평가로 수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아시아 금융시장은 의도적으로 중국 정부의 위안화를 평가절상시키지 않는 한 안정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이 때문에 최근 미국의 산업계는 과거 80년대 일본에 가했던 것처럼 중국에 대해서도 무역제한을 가할 수 있는 301조를 발동해 위안화 절상을 유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과거의 경험을 보면 한 지역 안에서 화폐 가치 불균형이 이처럼 심해질 경우 나중에 큰 폭의 조정과 그에 따른 혼란이 일어나는 일이 많았다.

현재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이 자국의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일본을 비롯한 주요 아시아 국가들이 경쟁적인 평가 절하를 통해 자국의 경제침체를 계속 이웃나라에 전가하는 ‘근린 궁핍화 정책’(Beggar-My-Neighbor policy)을 쓰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럴 경우 아시아 지역경제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런 일이 중국의 양보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끝>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전무·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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