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363…아메 아메 후레 후레(39)

  • 입력 2003년 7월 9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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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학교에 가고 싶어요. 시집가서 애를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나 자신을 만들고 싶어요.” 소녀는 그때 처음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얀 치마저고리 차림의 여자는 가늘게 뜬 눈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꼭 갈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눈길보다 훨씬 부드럽고 그리고 훨씬 더 멀었다. 소녀는 그 눈길과 목소리를 마음에 담고, 이 사람과 순 우리말로 얘기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난 내내 언니가 있었으면 했어, 언니가 몇 명이나 있는 교준하고 게이코가 얼마나 부럽던지. 언니한테 머리도 빗겨 달라 그러고 땋아 달라 그러고, 머리끈하고 머리핀도 얻고, 엄마한테 말하면 화낼 일은 언니하고 의논하고…정말 내 언니가 돼 줄까? 그럼 정말 좋을 텐데. 군복 공장에 도착하면 실컷 얘기해야지, 근무 중에는 사담이 금지돼 있을 테지만, 저녁 먹을 때나 목욕할 때, 잠자기 전에도, 얘기할 시간 충분히 있을 거야. 속도가 좀 느려졌다 싶어 밖을 내다보니, 열차는 벌써 교두(橋頭)역 홈에 들어서고 있었다.

연기가 자욱해서 확실하게는 알 수 없지만, 내리고 타는 손님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열차는 딱 1분간 정차해 있다가 숨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쉬 쉭 쉭 쉭 쉭, 칙 칙 칙 칙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륙’은 더 이상 파랄 수 없는 파랑과 더 이상 짙을 수 없는 초록 속으로 시커먼 연기의 선을 그으며 나아가고,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소녀의 단발머리는 연기와 같은 방향으로 나부꼈다. 열기에 빛바랜 태양이 조금씩 조금씩 하늘 높이 오르고 있다. 소녀는 연기 사이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꿈틀대고 있는데 거의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초록 바다, 소와 염소와 사람들은 다 어디로 숨은 것일까? 산에서 달려 내려온 바람에 초록이 수면처럼 물결을 일으키며 쏴 밀려왔다가 열차가 일으키는 돌풍 같은 바람에 지고 되밀려갔다.

왜 태양이 새파란 하늘에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보일까? 내 마음 탓일까? 더워서 땀이 뻘뻘 나는데 발치에서 한기가 슬슬 기어오른다. 나는 이 풍경이 한가롭고 아름답게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불모의 땅, 보면 안 된다고 쏘아보고 있는 듯한 느낌…왜? 왜지? 무장 강도와 항일 게릴라의 기습에 대비해서 나무를 다 베어버렸다는 얘기를 들은 탓일 거야, 그렇지.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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