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 금리시대]<5>나에게 정년은 없다

  • 입력 2003년 7월 9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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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이 일터로 돌아오고 있다.

노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50대나 60대 초반의 ‘젊은’ 노인들이다.

1998년부터 2002년 말까지 영국에서만 50∼65세 연령대 고용자 수가 65만명이 늘어났다. 노동유연성 확대로 80년대 이후 일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기도 하고, 또 일부는 국민연금 수령액을 포함해 그간 저축한 돈으로는 도저히 생활할 수 없는 은퇴자들이다. 퇴직을 거부하고 계속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국민연금 보유자산(연금기여분+투자수익)이 현재에 비해 3배로 불어나야만 연금적령인구(현재 남성 65세, 여성 60세)에 이른 연금수령자에게 이전 수준의 연금을 지급할 수 있다.

세계 제2차대전 후 서유럽에 불어 닥친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지금 50∼65세 연령 대에 이른 반면 기업은 90년대 들어 노동 유연성 확대로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며 일자리를 줄였다. 결국 기업의 연금 기여금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연금수령인구는 늘어난 셈이다.

▽기업연금 실패 사례=영국 남서부 카디프의 존 벤슨(56). 아버지가 다니던 철강회사 ASW에서 41년간 일하다가 2002년 7월 해고됐다. 해고되던 날 부인에게 말했다. “걱정 마. 우린 괜찮을 거야. 연금을 받게 되잖아.” 하지만 열흘 후 벤슨씨는 자신이 가입했던 기업연금으로부터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주가폭락으로 연금 원금이 손실을 입었고, 남은 것마저 이전 퇴직자에게 지불해 기업연금이 거덜났던 것이다.

벤슨씨는 말한다. “아버지가 27년인지 28년 전에 기업연금 설립에 관여했다. 그때 아버지는 ‘얘야. 이건 정말 좋은 연금이다. 네가 일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오면, 너는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너는 정말 좋은 노후생활을 보낼 것이야’ 라고 했다. 그래서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오히려 ‘행운’으로 생각했다.”

국민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연령이 아직 안된 벤슨씨에게 남은 선택은 새로운 일터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EU, “더 일하라“ 권고=6월 초 유럽연합(EU)은 유럽 정상회담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영국인들에게 “조기에 은퇴할 생각을 말고 더 오래 일하라”고 권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연금에 대한 영국정부 기여금은 EU의 15개 회원국 중 가장 낮았다.

2000년 기준으로 영국은 국내총생산 대비 5.5%의 재정을 국민연금에 투입하고 있다. EU 국가 중 가장 낮다. EU 15개국 평균 수치는 10.4%. 영국은 2050년까지 정부의 연금 기여액은 국내총생산 대비 4.4%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또 2050년까지 유럽에서 60세 이상 연령층이 현재에 비해 2배로 늘어나 전체인구의 40%를 차지하며, 이는 노동가능인구의 60%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재의 연금제도가 그대로 유지되면 성인 5사람 중 2명만이 일을 하고 3명은 연금생활자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때문에 이런 상황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유럽정부의 최대 고민이다.

▽연령 불평등 방지법 도입=영국은 2006년에 연령불평등방지법(Age Discrimination Legislation)을 도입한다. 이때에 이르면 45∼60세 연령층이 노동인구 중 가장 많다. 나이를 이유로 계속 일하고 싶어하는 60대 이상에 대한 해고도 불법이 된다. EU가 2000년에 이 같은 연령 불평등 방지를 ‘강력한 권고’ 사항으로 채택했기 때문에 영국이외에 다른 나라도 법제화할 가능성이 높다.

유엔도 최근 영국 정부에 “만약 영국인이 현재의 평균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싶다면 대규모 이민노동자를 받아들여 연금 기여액을 높이든지, 아니면 은퇴연령을 72세로 늘려야 한다”고 권고했다.

영국 정부가 국민의 복지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지 못하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됐다. 연금위기에 대한 연금생활자들의 불만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한 여성 연금생활자는 “이제 정부는 ‘연금 생활자는 자신이 묻힐 무덤을 스스로가 파야 한다’고 말을 할 것”이라며 정부에 대한 불신을 나타냈다.

런던=김용기기자 ykim@donga.com

▼오스트리아 연금지급前 퇴직대상자에 일정임금 보장 ▼


한국 직장인들의 노후는 불안하다.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남아 있으면 도둑놈) 같은 신조어가 말해주듯 50세 전후가 되면 직장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의 정년은 평균 56∼57세. 하지만 보통의 경우 정년을 채우기란 쉽지 않다.

기업도 할 말은 있다. 2001년 현재 50∼54세 근로자의 월 급여총액은 20∼24세 근로자급여의 1.8배에 이른다. 나이 든 근로자 1명을 내보내면 젊은 사원 2명을 채용할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숙련된 고령 근로자가 신참 사원 2명 이상 몫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황기 한국 기업들은 생산효율보다는 비용 요인을 중시하고 있다.

한편 고용조정 한파가 갈수록 거세지면서 국민연금의 재정 위기는 커지고 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현재 상태로는 2036년부터 연금기금의 적자가 발생하고 2047년경 기금 고갈이 우려된다고 밝히고 있다.

현실의 고용 관행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다. 노령연금이 지급되기 시작하는 60세 훨씬 이전에 보험료는 내지 않고 연금을 타는 가입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 활동에 해를 주지 않으면서 직장인의 노후 불안과 국민연금의 재정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은 없을까.

오스트리아가 1993년에 도입했던 ‘미끄럼연금’제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제도는 연금지급 개시 연령(65세) 이전(대개 60세)에 퇴직 위기에 놓인 근로자에게 5년가량 더 일자리를 보장하는 대신 임금은 젊었을 때의 70% 수준에서 시작해 연차적으로 줄여나가고 부족한 근로소득은 연금으로 보충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고령 근로자를 계속 고용할지 여부는 개별 기업 노사간 합의에 맡긴다. 이 제도 아래서 근로자는 퇴직 후 노령연금을 받기 전까지 소득이 뚝 떨어지는 것을 피하고 미끄러지듯이 연금생활자로 적응해갈 수 있다. 국가연금은 조기노령연금 지급액을 줄여 재정 부담을 던다. 기업은 비용과 생산성을 고려해 업종 및 기업 특성에 맞게 고령근로자를 탄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안을 갖게 된다.

오스트리아 빈대학 헨리히 스트레미처 교수(사회보험학)와 함께 유학 시절 미끄럼연금제의 기본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강남대 김진수 교수(사회복지학)는 “이 같은 제도는 근로자의 근로 의욕이 높고 국민연금 재정 위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많은 한국의 현실에 오히려 잘 들어맞을 것 같다”고 말했다.

빈=이철용기자 lcy@donga.com

▼대학硏 65세 비서 뮌스터씨 ▼

“내년에 정년을 맞으면 파트타임으로 3년 더 일할 생각이에요. 그 다음엔 못 배운 한을 풀 것입니다. 연극학 석사학위를 따고 싶어요.”

오스트리아 빈대학 사회법연구소에서 비서로 일하는 크리스틴 뮌스터(65·여·고졸·사진)의 노후 계획이다.

“쉰이 넘은 여자가 일자리를 잡기는 아주 힘들어요.”

자신은 행운이 여러 번 겹쳤다고 말한다. 공무원인데다 근로 여건도 좋고, 무엇보다 일찍 태어난 덕에 국가연금 개혁에도 손해를 보지 않는 세대에 속한다는 것.

젊을 때 낭비만 하지 않았다면 유럽대륙의 60대는 은퇴 후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뮌스터씨처럼 국가연금(은퇴 전 실질소득의 60%)과 은행 예금 및 적금(30%)에다 개인연금을 합하면 은퇴 전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니 70 가까운 나이에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빈대학 경제단과대학에 다니는 50세 이상 고령자는 전체 학생 2만2454명 중 63명. 인문대나 예술대에는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젊은 세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노후 생계자금을 마련하느라 여유가 없어서) 우리 세대처럼 칠레나 호주에 여행 한 번 못 갈 다음 세대가 안쓰러워요.”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실업자 게르하르트 플라이슈만(43)은 불운이 여러 번 겹친 경우.

20년 동안 철강공장과 제재소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쳐 일터를 떠난 그는 지금 매월 700유로(약 93만원)의 산재연금에 생계를 기대고 있다.

한창 일할 때 벌던 돈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지금까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하지만 이제 ‘헤어 트렁켄(늘 술에 취해 있는 사람이라는 독일어 표현)’이라는 ‘자랑스러운 조롱’을 언제까지 듣게 될지 그 자신도 알 길이 없다. 일 안해도 먹고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렸던 산재실업자의 처지가 망가진 몸으로 억지로라도 일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

“독일 연금제도가 점점 (재정상) 어려워진다는데

…. 산재연금도 그렇겠죠. 직장 다닐 때 보험료로 매달 500유로(약 66만7000원)를 내고 700유로를 받고 있으니 지금은 손해가 아니지만 몇 년 뒤 연금이 안 나오거나 줄어들면 어떡해야 할지….”

그는 요즘 1주일에 4∼5시간 건물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만일에 대비한 일하기 연습이다. 하지만 “연금이 계속 나오는 한 (본격적인) 일은 하지 않을 생각”이란다.

빈·하이델베르크=이철용기자 lcy@donga.com

<마이너스 금리시대 실천재테크 Ⅱ부-해외편 시리즈 순서>

1. 부모와 함께 하는 10대 재테크

2. 외화채권에 눈 돌리는 일본인

3. 입맛에 맞게 고르는 은퇴 후 생활설계

4. 못 믿을 국가, 노후 자금은 내가 직접

5. 나의 사전에 정년은 없다

6. 우리 부부는 이렇게 노후를 준비한다

7. 생명보험 100% 활용하기

8. 저축에서 투자로 패러다임 시프트

9. 주식투자의 빛과 그림자

10. 나는 투자신탁으로 간다

11. 목돈 없이도 하는 부동산 투자

12. 금융교육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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