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나무]<13>홍창기 아산의료원장

  • 입력 2003년 7월 7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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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기 아산의료원장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을 때 진료도 교육도 제대로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이훈구기자
홍창기 아산의료원장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을 때 진료도 교육도 제대로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이훈구기자
《홍창기 아산의료원 의료원장(66)은 신장내과 전문의로 서울아산병원 원장을 지냈으며 최근엔 한국의학교육협의회 회장으로서 의학교육의 개혁에 앞장서고 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의학교육을 위해 노력해온 그는 후배 의사들에게 단순한 병의 치료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의사가 될 것을 강조해 왔다.》

그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됐지만 진료를 하면서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대학에서는 모든 생명현상을 물리적 화학적 방식으로 설명하는 환원론(reductionism)에 입각해 가르쳤으나 이것만으로는 실제 진료과정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원론에 따르면 인간에게 탈이 날 경우 병이 난 부분만 고치면 됐다. 그러나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편안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다양한 방면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의학이 편협한 인간관에 기초한 치료법을 사용하는 탓에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고민을 할 무렵 마침 가톨릭교회에서도 중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가 1959년 1월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신·구교의 일치를 밝히는 담화를 발표하고 이 목표의 실현을 위해 1962년 10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다. 요한 23세가 사망한 뒤 1965년까지 4회에 걸쳐 소집된 이 공의회는 전 세계의 주교들로 구성된 최고 합의체였다. 공의회에서는 신앙의 기본 문제들을 결정하고 교회는 공의회가 결정한 사항들을 발전시키고 실행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9)가 열린 지 약 100년 만에 열린 제2차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교회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1859) 이후 발전해 온 자연과학을 비롯해 그동안 인류가 쌓은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포용했다. 이를 위해 교회는 세계를 이미 완성된 정적 존재로 보는 고전적 세계관을 버렸다. 대신 꾸준히 변화하는 역동적인 세계로 바라보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현대사회의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사회에 봉사하는 교회관을 세웠다. 인간의 영적 차원만을 자신의 고유영역으로 생각해 왔던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인간을 영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차원도 가지고 있는 인격적 존재로 이해하게 됐다.

서구에서 점차 부상한 의학의 비인간화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가톨릭 공의회의 성과는 1980년대 초부터 의학계에 가시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물론 의료계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은 현대의학에 어떤 결함이 있다는 것을 직관적, 체험적으로 느껴 왔지만, 이런 생각을 정리해서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이 무렵부터 나타났다. 데이비드 라이저와 데이비드 로젠은 저서 ‘인간 경험으로서의 의학(Medicine as a Human Experience)’을 통해 인간을 생물학적 모델로만 보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심리적 차원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이었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자신이 갇혀 있던 나치의 집단수용소 안에서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관찰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의미 추구(Man’s Search for Meaning)’라는 책을 썼다.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은 삶의 의미를 잃으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로 전락하고,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도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홍 원장은 “이 책을 보면서 인간에게 영적 차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89년 서울대 의과대학 은사인 이문호 교수는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며 미국 신시내티대 신장내과에 재직 중이던 홍 교수에게 내과를 맡아줄 것을 제의했다. 홍 원장은 “이 교수는 일찍부터 현대의학의 지나친 분화를 염려했던 분”이라며 “의사가 환자의 ‘병’만 볼 것이 아니라 ‘병을 가진 사람’을 보아야 한다며 통합적 진료를 주장해 왔던 그의 밑에서 이상적인 내과를 만들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두말없이 귀국했다”고 말한다.

그는 귀국 직후 신장내과학회에서 ‘임상의학의 위기’라는 제목의 특강을 했다. 편협한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인간 모델을 전제로 하면서 임상의학이 위기를 맞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강연은 의료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제일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고, 자신도 그런 훌륭한 삶을 살고 싶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중고교 선생님이 제일 훌륭해 보였고, 의대에 들어가서는 일반 의사보다 의사이면서 교수인 사람이 더 훌륭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일관된 꿈은 좋은 선생님이었던 셈이다.

의사가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이었을지 모른다. 경기고 2학년 때 그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의대 입시에 시험 삼아 응시했다. 그런데 덜컥 합격하는 바람에 의사가 됐다. 그는 “다행히도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은 보람도 있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일이어서 의사의 길을 택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직접 환자를 치료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는 훌륭한 의사를 길러내는 일에 더 큰 보람을 느꼈다. 그는 미국에서도, 국내에서도 줄곧 임상의 겸 교수를 고집해 왔다. 1990년대 후반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았고 지금도 한국의학교육협의회 회장으로 의학교육의 개선을 위해 애쓰고 있다.

홍 원장은 의사의 가장 중요한 자격조건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꼽는다. 이것은 그가 교사의 첫째 조건으로 꼽는 자질이기도 하다. 그는 “사랑이란 상대방이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인간을 잘 이해하고 그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의사는 환자를 다루고, 교사는 학생을 다룬다. 결국 둘 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기본이다. 홍 원장이 의과대학을 다니며 배운 것은 생물학적 관점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의학교육에서 배운 인간개념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다양한 방면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추구했다.

인간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알기 위해 체질인류학을 공부했고 인간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이 밖에 사회학, 경제학, 정치적 행위 등 사람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조금씩 공부했다.

종양혈액학 전문의인 아내(김상희씨)와 함께 미국 신시내티대 교수로 재직했던 80년대 중반에는 가톨릭신학교에서 종신부제(副祭) 과정을 밟기도 했다.

이를 통해 인간에게는 여러 측면이 있으며, 어느 한 측면이라도 무시하면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효과적인 진료도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내린 정의에 따르면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나 불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행복한(Wellbeing) 상태를 말한다. 홍 원장은 여기에 영적 행복(Spiritual wellbeing)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의지, 창조본능, 윤리적 행태 등 생물학적 본능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측면을 포괄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의료도, 교육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연구 성과들을 섭렵하며 인간 이해를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는 “아직도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절감한다”고 말한다. 홍 원장은 이제 진료 현장에서 물러나 의학교육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은퇴 후에는 인간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얻기 위해 도서관에 파묻혀 살면서 취미삼아 고고학 유적지들을 찾아볼 계획이다. 인간 삶의 역사에 대한 근원적 탐구인 고고학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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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완치(cure)가 불가능할때도 돌봄(care)은 가능하다 ▼

의사가 할 일에는 돌봄(care)이 반드시 포함돼야 하며 돌봄을 통해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질병의 상태, 기능 장애의 정도에 따라 완치(cure)는 불가능할 수 있지만 돌봄은 언제나 가능하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환자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를 잘 이해해야 하며 환자를 한 ‘사람’으로 잘 알기 위해서는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 때로는 시간을 두고, 반복해서, 조심스럽게 계획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 바쁜 일과 중에 이렇게 환자를 이해하고 환자의 가치관을 파악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환자나 그 가족과 함께 모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것은 좋은 환자-의사 관계의 수립과 돌봄에는 불가결한 요소다. 명의(名醫)는 완치뿐 아니라 돌봄을 잘 하는 사람이다. 돌봄을 잘하는 의사는 사람과 의업을 사랑하는 의사다.

‘인턴진료지침서’(아산의료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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