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임채청/대필(代筆)

  • 입력 2003년 7월 4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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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은 나의 말이 아니며 나의 웃음은 나의 웃음이 아니다.’ 대필작가(Ghost Writer)를 소재로 한 이청준의 1978년도 작품 ‘자서전들 쓰십시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이다. 주인공은 결국 인기 코미디언의 자서전 대필을 중단하면서 의뢰인에게 ‘과거가 아무리 추하고 부끄럽더라도 솔직히 시인할 정직성과 참회할 용기, 자신의 것으로 사랑할 애정이 없으면 자서전 발간을 단념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도 단념하지 못한 유명인사들이 많은 듯하다. 조금만 이름이 알려지면 너도나도 대필작가의 손을 빌려 자전적 에세이들을 쏟아내고 있어 대필전문출판사까지 생길 정도다. 하기야 힐러리 회고록도 대필작가가 쓴 것이라니 우리만 탓할 일도 아니다.

▷꼭 그런 대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맹자가 많았던 시절 군 막사에선 병사들의 편지대필이 성행했다. 다른 사람이 대필해준 것이라도 입대한 아들의 안부편지는 고향의 부모를 얼마든지 울렸고, 단심(丹心)을 언약한 애인의 연애편지는 처녀 가슴을 얼마든지 뛰게 만들었다. 그 시절엔 관공서 주변에 대서소도 참 많았다. 그곳은 변호사 사무실을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의 종합민원소였다. 돋보기를 낀 대서소 아저씨의 달필은 글눈이 어두운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대필 논쟁이 우리 사회를 갈라놓은 적도 있었다. 1991년 5월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한 한 재야단체 간부의 유서 때문이었다. 그 유서가 고인이 작성한 게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어둠의 배후세력’ 논란으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생 노동자 가정주부의 분신이 10여건이나 잇따라 한 시인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외치기도 했던 끔찍한 시기였다. 검찰은 대대적인 수사 끝에 고인의 한 친구를 유서대필 혐의로 구속했다. 그는 대법원에서 자살방조죄로 유죄확정판결을 받았으나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대필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총선이 멀지 않은 만큼 또 정치인들의 홍보용 서적 출간 러시가 예상된다. 워낙 바쁘신 몸들이라 역시 대필에 의존하기 십상일 것이다. 대신 읽는 대독(代讀)도 흔한 정치판이라 대신 쓰는 대필쯤이야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정치권뿐만 아니다. 요즘은 대입지원을 위한 자기소개서나 학위논문까지 대필로 작성해 제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우리 사회를 가히 ‘대필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아무리 그래도 서예대전까지 대필로 얼룩진 것은 너무 심하다. 예술까지 속임수가 끼어들어서야 더 믿을 데가 없다.

임 채 청 논설위원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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