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나무'…‘발랄한 상상력’ 세상을 해부하다

  • 입력 2003년 7월 4일 1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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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304쪽 8800원 열린책들

어느 날 눈앞의 벽이 자취를 감추고, 대신 ‘벽, 두께 50cm, 콘크리트’라는 글씨가 나타난다면? 날아다니던 비둘기가 사라지고 대신 ‘비둘기, 무게 327g, 수컷’이라는 글씨만이 떠다닌다면?

우리는 전송에 문제가 생긴 인터넷 웹사이트를 떠올릴 것이다. 공룡의 그림이 있어야 할 모니터 화면에 ×표와 ‘dino.jpg’라는 글씨가 뜨는 것처럼.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아왔던 세상이, 사실은 슈퍼컴퓨터에 의한 가상현실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의 감각을 조작해 온 것은 누구였을까? ‘개미’ ‘뇌’의 작가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는 이와 같이 경이로운 환상, 또는 경악스러운 공상으로 가득하다.

독신자 뤽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가전제품들에 대고 짜증을 낸다. 인공지능을 갖춘 사물들이 그를 간섭하기 때문이다. 입맛이 없어도 아침마다 냅킨은 알아서 목에 감기고 주전자는 차를 따른다. 비디오폰은 방문자를 맞이하라고 소리를 질러댄다.

“물건들이여, 그대들에게 영혼이 있는가?” 뤽의 외침이 그의 답답한 상황을 대변한다. 그러나 독자는 결국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뤽 또한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였기 때문이다. (‘내겐 너무 좋은 세상’)

어느 날 파리 뤽상부르 공원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운석이 떨어진다. 너무도 고약한 냄새를 풍겨, 시 당국은 고민 끝에 운석에 두껍게 유리를 입혀 냄새를 차단한다. 그런데 아름답게 빛나게 된 운석이 갑자기 사라진다. 인간이 진주조개에 이물질을 넣듯이, 그 운석은 바로 외계인이 장신구로 가공하기 위해 지구에 일부러 던져놓은 물체였던 것. (‘냄새’)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의 시선을 빌려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이 말은 열여덟 편 단편의 주제를 성글게 관통한다. 데뷔작 ‘개미’에서 작가는 우리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발밑에도 독립된 우주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끔씩 등장하는 인간의 손길은 이들에게 불가사의한, 또는 전지전능한 것으로 비쳤다.

한편 한편이 장편영화의 소재가 될 만한 새 책에서 작가는 종종 ‘개미’적 상상력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인간세계는 사람보다 더 우월한 존재의 관찰이나 놀림감이 된다. 인간은 사육 가능한 애완동물로서 습성과 특징이 기록되고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문명 또한 어린 신(神)들이 ‘창조’ 과목의 실습과정에서 빚어낸 오류투성이의 과제물이 된다(‘어린 신들의 학교’). ‘완전한 은둔자’에서 주인공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외부로 통하는 신경을 모두 절단한 뒤 영양액을 공급받는 두뇌덩어리로 존재하지만, 그의 순수한 정신도 물질적으로는 개의 한나절 식사거리로 환원된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세계 밖으로 나온’ 작가는 그것이 어느 정도 ‘아이의 시선’ 과도 같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아이의 눈으로 들여다보았기에, 인간의 세계는 오히려 인류 문명의 미숙성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밖에서 본 인간은 ‘서로 싸우고 죽이기 좋아하는 존재’이며 그들의 구애 행동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지갑을 부풀리는 것’이다.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세상의 어떤 피조물보다도 우월하고 가치 있다”는 볼멘 항변은, 그러므로 작가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냉정한 직관 아래 힘이 빠진다. 현상으로서의 인간사회는, 분명 자기 소모적인 분열과 살육의 미숙함과 유치함을 날마다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의 원서는 나오자마자 곧장 베스트셀러 1위로 직행해 각종 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는 이른바 ‘공쿠르 시즌’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사전 주문만으로 각종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1위로 올라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인류의 본질에 대한 숙고’를 대중화했다는 새로운 의미도 갖는다.

제목 ‘나무’는 책에 수록된 단편 ‘가능성의 나무’에서 따온 것. 작가는 ‘노동시간을 줄인다면’ ‘미니스커트가 다시 유행한다면’ 같은 미래의 여러 가능성을 나무 모양으로 도식화함으로써 미래를 더욱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제안은 ‘가능성의 나무’라는 웹사이트(http://www.arbredespossibles.com)로 현실화됐다. 현재 재단장 중이어서 접속할 수 없지만, 이 사이트에서는 여러 분야 전문가와 지식인의 참여 아래 인류가 가진 여러 가능성이 활발하게 토론되고 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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