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358…아메 아메 후레 후레(34)

  • 입력 2003년 7월 3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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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두 손으로 두드리듯 세수를 하고 젖은 얼굴을 블라우스 소매에 닦고 홈을 걸었다. 국방색 정모에 제복차림의 연결사는 전기선과 수도관을 잇고, 빨강 초록 깃발을 흔들어 기관사에게 뭐라 뭐라 신호를 보냈다. 조선철도 여객전무는 만주철도 여객전무에게 좌석일람표를 건네면서 인수인계를 하고 있는데, 검댕이 묻은 얼굴로 ‘대륙’에서 내린 조선철도 기관사와 차장, 급사들은 차안에 있을 때하고는 전혀 다르게 지칠 대로 지친 표정으로 온몸을 끌듯이 홈을 걸어가, 인사 한마디 나누지 않고 만주철도의 제복을 입은 기관사와 차장, 급사들과 지나쳤다.

소녀는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별…별…평양에 올 때까지는 그리도 몹시 비가 내리더니…만천에 별이란 이런 하늘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봐…반짝반짝 빛난다…마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별들이 빚어내는 음악소리가…. 별들은 몇 억 광년이나 떨어진 저편에서 소녀의 혼에 빛의 비를 뿌렸다. 두 눈으로 새어드는 휘황한 빛이 머릿속에 하얗게 비치고, 소녀는 부신 눈을 견딜 수 없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뒤통수와 엉덩이에 넓적한 손바닥 같은 것이 끼어들고, 앗 하고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소녀의 몸이 수평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 혼의 어둠 어딘가에 조그맣게 접혀 있던, 갓 태어났을 무렵의 기억이 수선꽃 몽우리처럼 소리 없이 벌어지면서 온몸 구석구석으로 야릇한 그리움이 번졌다. 소녀는 느꼈다.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기척을. 소녀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이렇게 나를 안아주는 것이라고. 제비꽃 같은 우리 첫 딸, 따스하고 두툼한 손바닥으로 긴장과 감동이 전해졌다. 이건 과거? 아니면 꿈? 아버지, 거기 계시는 거예요? 지금 날 안아준 거예요? 소녀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을 뜨면 아버지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눈이 부시다, 그래도, 살짝 눈을 뜨는 순간, 써늘한 손바닥이 두 눈을 덮었다. 여자의 손이다. 이번에는 누구지? 손바닥은 하얀 빛을 빨아들이고 소녀의 머리를 다시 어둠으로 채웠다.

눈을 뜨자, 기관차 굴뚝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에 새하얀 증기가 섞이면서, 폭 폭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뭉글뭉글 뿜어 나왔다. 출발이다. 빨리 자리로 돌아가야지.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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