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용 목사에 듣는다]"盧, 늦어도 9월전에 발상 바꿔야"

  • 입력 2003년 7월 1일 19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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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는 86세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기억력과 열정적인 어조로 시국에 대한 분석과 조언을 이어나갔다-이종승기자
강원용 목사는 86세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기억력과 열정적인 어조로 시국에 대한 분석과 조언을 이어나갔다-이종승기자
《집안이 곤경에 빠졌을 때 어른이 그리워지듯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는 원로가 생각난다. 최근 자신의 생애를 뒤돌아보는 전 5권의 회고록을 낸 강원용(姜元龍·86) 목사를 찾아 나선 것은 비단 한 정권의 위기를 진단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큰 틀에서의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과도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조언해온 그는 한국 현대사의 고비 고비에 얽힌 비화들을 소개하며 격랑에 흔들리고 있는 ‘한국호’가 나아갈 방향과 미래를 열정적으로 제시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보낸 생일축하 난 화분이 놓여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90분가량 진행됐다. 》

―국정의 위기를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목사님의 인식과 진단은 어떠신지요.

“제가 광복 이후 사회운동을 하면서 ‘정말 위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6·25전쟁 직전과 당시입니다. 49년 8월 기독학생연합회장이 미국으로 유학 가는 송별회에서 저는 ‘1년 안에 큰 전쟁이 날지 모르는데 잘 빠져 나왔구나 하고 생각하지 말고 조국 땅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고난에 동참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 미군 철수, 미국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미 딘 구더햄 애치슨 국무장관의 발언 등 전쟁이 일어날 요소가 증폭되고 있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봤습니다. 두 번째는 4·19 이후 민주당 정부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민주당 각료들은 개혁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봤지만 저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잠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때 상공부 장관에겐 ‘수의(囚衣)나 좋은 걸로 준비하라’고 말해두기도 했습니다.

지금이 세 번째입니다. 4·19 당시엔 군이나 학생이 대안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대안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노 대통령이 위기를 느끼고 비상한 각오로 정책 방향을 ‘확’ 바꿔야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지만 언젠가 왔던 길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혼잣말하듯 말했다.

―정국에 대한 전망은….

“제가 구체적으로 위험하게 보는 것은 내년 4월 총선입니다.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선거를 치르면 노 대통령 지지 국회의원은 아주 소수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투표율이 30%를 넘지 못할 겁니다.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취임 후 2년 동안 지지를 받다가 이후 레임덕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태라면 노 대통령은 내년 4월부터 레임덕으로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이러면 정권을 끌고 나갈 수 없습니다. 남북 또는 한미 문제에 대해서도 ‘전쟁은 안 된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나머지는 협상을 통해 풀어야 하는데 이게 확실치 않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노 대통령이 생각의 방향과 발상을 확 바꾸면 아직도 기회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9월로 넘어가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럼 9월 전에 무엇을 바꿔야 하느냐. 우선 정책을 바꿀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비서진을 싹 바꾸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노 대통령을 견제하고 조언할 수 있는 소수의 확고한 팀을 만들어 이들의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코드가 맞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려서는 안 됩니다. 또 경륜을 가지고 바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정기적으로 만나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언론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비판적 신문은 반드시 읽고 소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도 했던 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른 일에 앞서 신문의 얘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이 몇 가지를 큰맘 먹고 바꾸면 기회가 있다고 봅니다.”

―여당과 야당 등 정치권에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철새 정치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는데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요즘 같은 난세에는 철새 정치인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위기의식을 갖고 내년 4월 선거에 대비할 ‘철새 정치세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10∼20년밖에 못 갈 정당은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눈앞에 닥친 위기를 넘겨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는 이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대통령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지지와 견제 역할을 할 정치세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단 뭉치고 내년 가을에 헤어져도 좋습니다.”

―남북 문제에 대해선 김대중 정부 초기에 고언을 많이 하셨고, 해외 전문가들과도 깊은 교분이 있으신 것으로 압니다.

“무조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린 이라크와는 다릅니다. 서울과 휴전선은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170만 인민군이 가진 재래식 무기는 미국의 초현대적 무기에 비해 형편없습니다. 전쟁이 나면 물론 미국이 이깁니다. 하지만 북은 최소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94년 북핵 위기 때 전쟁 직전까지 간 상황에 대해 제임스 레이니 당시 주한 미 대사 등으로부터 상당히 깊은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을 선제공격할 생각까지도 했었던 모양인데 레이니 대사가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에게 얘기해서 김일성을 만나보도록 해 돌파구를 마련했습니다. 그때 전쟁이 일어났으면 아마 사망자가 500만명, 부상자가 2500만명은 됐을 겁니다. 이번에 전쟁이 나면 94년보다 훨씬 피해가 클 겁니다. 전쟁은 반드시 막고 그 이후의 일은 상호주의로 하든 뭘로 하든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국내 상황으로 얘기를 돌려보지요. 대북 송금에 대한 특검 중단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동독과 서독이 평화적 통일로 가기까지의 과정을 독일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과 헬무트 슈미트 총리, ‘동방정책’을 폈던 사회민주당 빌리 브란트 총리 밑에서 동독 정책을 담당한 에곤 바 등에게 소상히 들었습니다. 이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통일은 돈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리처드 닉슨 전 미 대통령 같은 보수주의자도 중국과 수교를 할 때 상당히 돈을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에 돈을 보낸 것을 문제 삼으면 남북 화해를 하지 말자는 얘기와 같습니다. 다만 김대중 정부의 남북 대화 및 대북 지원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독은 동독 지원에 대해 반드시 야당과 긴밀히 협조했습니다. 야당이 반대한 사안도 ‘이렇게 할 테니 알고는 있는 게 좋겠다’고 통보해 줬다고 합니다. 이후 집권한 기독교민주당은 사회민주당이 썼던 정책을 대부분 바꿨지만 동독 정책만은 안 바꿨습니다. 서로 협의했던 일이니까요. 특히 현대를 통해 돈을 준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서독 정부는 쌀 등 구호품에 해당하는 것은 독일 교회를 통해 줬습니다. 정부가 직접 줄 때는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이것을 줄 테니 정치범 1000명을 석방하라’ 등의 조건을 달았습니다. 대북 송금 문제는 정상회담 공작금 운운하며 통치권자가 교섭하는 과정에 돈 쓴 것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 과정과 절차를 따져 봐야 합니다.”

―방송과 40년 넘게 인연을 맺어 오신 걸로 압니다. 노무현 정부의 방송정책, 크게는 한국 언론 전체에 대한 고언을 부탁드립니다.

“1962년 방송윤리위원장을 맡은 뒤 41년째 방송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비전문가인 제가 방송과 오랜 인연을 맺은 것은 방송이 국민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의 제왕(帝王)’이기 때문입니다. 양질의 방송 프로그램이 국민의 정신적인 자양분이라면 저질의 프로그램은 부정식품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정식품을 오래 먹으면 병이 드는 것처럼 방송이 좋지 않은 프로그램을 만들면 국민의 정신이 병듭니다. 방송 제작자들은 정권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국민을 염두에 두고 일해야 합니다. 국민에게 해독을 주는 프로그램은 결코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41년간 방송을 지켜보면서 항상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고 생각해 왔지만 요즘처럼 나빴던 때가 없습니다. 최악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격동의 현대사를 헤쳐 온 나라의 원로로서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에게 정말 미래와 희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물론입니다. 성경 로마서 13장 12절을 보면 ‘밤이 깊어 새벽이 가까웠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한반도의 새벽을 봅니다. 남북간 교류만 원활하게 돼도 21세기 동북아시아 중심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부터 ‘절대 전쟁만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중국을 특히 잘 활용해야 합니다. 노 대통령께서 곧 중국을 방문하시는데 제가 노 대통령이라면 중국에 외교적 역량을 집중하겠습니다. 한국민은 잡초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 멋을 아는 전통, 그리고 신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노 대통령이 역대 어느 권위적 대통령과는 다르게 국민의 신바람에 불을 지를 수 있는 분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게 사실입니다. 노 대통령이 민족의식의 깊은 광맥 속에 있는 신바람에 불을 지른다면 우리 민족은 정말 21세기 후반에 들어가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민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91세로 아직도 북의 고향(함경남도 이원)에 생존해 계신 누님을 여생에 꼭 한번 만나 뵙고 싶다. 그동안 여러 차례 북의 초청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돈을 요구해 초청장을 찢어 버렸는데 누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리=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강원용 목사는…▼

개신교 내 진보교단인 기독교장로회 출신으로 1949년부터 경동교회에서 40년 가까이 목회활동을 하며 한국 교회 발전과 사회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1963년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세워 대화와 토론 문화 향상에 이바지했다. 또 1962년 방송윤리위원장을 맡은 이래 40여년간 방송 발전에 기여했다. △1917년 함경남도 이원 출생 △경동교회 목사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 및 이사장 △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아시아종교평화회의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세계종교평화회의 공동의장 △평화포럼 이사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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