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진덕규/올곧은 원로

  • 입력 2003년 6월 29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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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아일보에 실린 김수환 추기경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맨 처음에 든 생각은, 외람되지만 ‘원로라면 모름지기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어사전에서 원로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면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해 높은 덕망을 지닌 공로가 큰 연로자’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원로란 사전 뜻풀이 이상의 역할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나라 형편이 어려울 때 팔을 걷고 나서 모두의 힘을 모아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큰 어른, 그런 분이 진정한 원로가 아닐까 한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원로’가 너무 많아서 탈이다. 걸핏하면 ‘원로와의 대화’ 같은 명목으로 나이 드신 분들이 대통령 같은 높은 사람 옆에 앉아 같이 식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 자리에 나오는 ‘손님’은 대체로 단골처럼 정해져 있는데 그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양지족(陽地族)’이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언제나 햇볕 잘 드는 양지에만 앉아 있으려고 하는 분들이다. 둘째로 ‘무임승차족’이다. 원로라고는 하지만 과연 원로답게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셋째로 좋은 자리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 ‘독식주의자’들이다. 연로한 나이에도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쓰고 있는 감투가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사람들은 높은 사람에게 고언은커녕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한다.

▷다행이라면 우리 주변에 아직도 ‘올곧은 원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분들은 스스로 원로라고 불리기를 극구 사양한다. 또한 겉만 번지르르한 자리에는 절대로 나서지 않으려고 하신다. 이런 분들이 의외로 많이 계시는 것은 그나마 우리에게 든든한 마음을 갖게 해준다. 이들은 사회의 웃어른으로서 필요할 때마다 높은 사람들에게 쓴 소리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을 기억할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낀다. 그런 어른들이 계셨기에 나라가 이 정도나마 유지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제는 원로도 교체되어야 한다. 쓴 소리 하는 원로, 대갈일성으로 꾸짖음과 깨달음을 내리는 원로, 그러면서도 지난날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올바르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그런 원로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양지족’ 원로들의 ‘연출’된 장면을 보다가 김 추기경의 고언(苦言)을 접하니 ‘원로의 가르침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김 추기경께 고마움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진덕규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 dkjin@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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