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삼성그룹 회장 이건희<5·끝>

  • 입력 2003년 6월 29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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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우리 기술로 만든 다리다. 대단하제.”

1960년대 중반의 어느 날. 고교(서울대사대부고) 동창인 홍사덕(洪思德·한나라당 국회의원)군과 이건희군이 한강변을 달리고 있었다. 홍군은 대학 복학생이었고, 이군은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 중 방학을 맞아 귀국한 것.

외국 유학 중인 친구에게 은근히 질투심이 일었는지 홍군이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를 가리키며 우리 국력을 자랑했다. 곧 이군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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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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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눔아. 좀 길게 봐라. 한강은 장차 통일되면 화물선이 다닐 강이다. 다리 한복판 교각은 좀 길게 잡았어야 할 것 아이가.”

홍 의원은 29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그 같은 일화를 전하면서 “건희는 긴 묵상 끝에 열 단계, 스무 단계를 뛰어넘어 말하는 친구였다”고 회고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연상을 따라간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고도 했다.

한강다리를 보며 통일 후를 생각했다는 그 이건희군은 동양방송 이사 시절이던 1973년 “미래 국제화시대에 대비해 삼성에 세계 각 지역에 대한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다녔다고 한다.

―수년 전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던, 희망하는 나라에 가서 1년간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게 해준다는 ‘지역전문가제도’ 얘기를 1970년대부터 하셨나 보죠.

“그래요. 하지만 70년대에는 반향이 없더군요. 1986년에 한 번 더 소리쳤어요. 그때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더군요. 88년에 회장이 되고 나서 말했는데도 안 움직이더군요. 결국 89년에 다시 고함을 치고 나서야 겨우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88년부터만 보냈더라도 이들이 벌써 사업부장은 되었을 텐데…. 그 기회 손실은 말로 다 못합니다. 아마 10조원은 될 겁니다.”

이와 관련한 삼성 인사팀 관계자들의 전언.

“1990년 지역전문가제도를 만들면서 당시 비서실에서는 큰마음 먹고 앞으로 5년간의 양성규모를 500명으로 잡았지요. 그런데 회장의 꾸중이 대단했습니다. 1000명으로 대폭 확대해 보고했지만 또 호된 꾸중을 듣고 2000명으로 확대했습니다. 결국 현재까지 지역전문가를 2500명가량 양성했는데 턱없이 부족한 상태예요. 당시 이 회장이 이미 10년 앞을 내다보고 지시했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은 “그나마 양성된 지역전문가 출신들이 세계 각지에서 일하고 있다”며 “그들이 경험한 것이 개인의 경쟁력이고 회사의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인력은 최고경영층이 직접 관리해서 우수인력이 강제로라도 선발될 수 있도록 하고, 사후관리를 철저히 해서 미래의 핵심인력으로 키울 것입니다. 그리고 글로벌 경영은 국내에서도 이뤄져야 합니다. 현재 국내 삼성 사업장에는 외국인 우수인력이 500명가량 있는데 이들 중에서 최고경영자(CEO)도 나올 겁니다.”

이처럼 이 회장은 멀리 내다보고 일을 도모한다. 이는 바로 그가 앞으로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경영자상(像)과도 직결된다.

―회장께서 바라는 21세기형 경영자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미래 변화에 대한 통찰력과 직관으로 기회를 선점하는 전략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혁신을 통해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변화 추구형이어야 해요. 또 경영자 스스로가 고부가가치 정보의 수신자 발신자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국제적 감각은 필수 요건이지요.”

이 회장은 또 “경영은 하나의 종합예술입니다. 사장이 무능하면 그 기업은 망한다 해도 틀림이 없을 정도로 경영자의 역할은 막중하지요. 그러나 의욕과 권한만 갖고는 안 됩니다. 종합예술가에 비유될 정도의 자질과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 회장이 이번 동아일보와의 회견에서 밝힌 핵심 육성 대상 인재는 천재, 이공계 기술인력, 여성인력, 끼 있는 인재, 글로벌한 인재 등 5개 항목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그 같은 핵심 인재상이 이른바 ‘정통 엘리트’의 중요성과 상충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의 성공은 이 회장이 꿈을 제시하면 그것을 치밀한 조직력의 참모들이 뒷받침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이 회장은 자신과 함께 꿈을 꾸며 새로운 컨셉트를 창출해 낼 천재들, 그리고 그 꿈을 비즈니스화해 줄 적극적이고 치밀한 인재들을 삼성을 끌고 갈 두 바퀴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모든 기업가는 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꿈을 뒷받침할 조직력과 헌신적인 일꾼들이 없다면 리더의 꿈은 몽상이나 무모한 모험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이 회장도 “박찬호의 야구를 보면서 포수라는 숨은 영웅을 생각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제일모직이나 제일합섬을 거쳐 비서실에 발탁됐던 치밀한 재무통 출신 CEO가 전체 사장단의 30%가량에 달한다는 점도 삼성에서 ‘예나 지금이나 잘 나가는’ 인재 유형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기자는 최근 삼성의 전현직 고위 관계자 3명에게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이 회장이 성실성 창의성 책임감 정직성 전문성 등 아랫사람(경영자급)의 여러 덕목 중 가장 중시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느꼈느냐”는 공통된 질문을 던져봤다.

대답은 한결같이 일치했다. “창의성이죠.”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마차를 더 잘 만드는 인재도 중요하지만, 마차에서 자동차를 꿈꿀 수 있는 그런 창의적인 인재상을 이 회장은 바라는 것 같다. 그동안은 선진국이 만든 걸 잘 베껴서도 먹고 살았지만, 이제는 누구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만들 수 있는, 사물의 컨셉트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을 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창의성과 더불어 “긍정적, 낙관적 마음가짐도 이 회장이 바라는 인재의 덕목”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또 행동 유형별로는 말이 많은 스타일보다는 충분히 준비하고 연구해서 필요할 때 집중적으로 설득력 있게 말을 하는 (자신과 닮은)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삼성 관계자들은 전했다.

경영자의 인간미도 이 회장이 중시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 회장은 삼성인의 자세로 “뛸 사람은 뛰고, 앉아 있을 사람은 앉아 있어라. 그런데 뛰는 사람은 앉은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잘 쉬었다가 너도 잘 뛰어라’고 격려해 줘라. 앉아 있는 사람은 뛰는 사람을 질투하지 말고 박수를 쳐주며 ‘나도 빨리 체력을 회복해서 다시 뛰어야지’라고 생각하자”고 강조해 왔다.

그렇다면 이 회장의 이 같은 인재관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일까.

홍 의원이 29일 들려준 고교 때의 일화 한 대목. “당시 삼성에서 간부 한 분이 내쳐졌어요. 그런데 고교생 건희가 아버지(고 이병철 회장)께 그분의 복권을 고집스레 건의하더군요. 그분은 나중에 삼성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요. 당시 건희에게 ‘고등학생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건희가 그러더군요. ‘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한다’고.”

이기홍기자 sechepa@donga.com

▼이회장의 인재양성 3계명 ▼

이건희 회장이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수상자에게 시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① 1등은 과감하게 보상

② 학연-지연은 절대 금물

③ '패자 부활전' 기회준다

지난해 1월 9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이건희 회장의 생일파티. 계열사 CEO들은 멀찍이 서서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어이 OOO사장. 기업 경영은 그렇게 잘하면서 왜 자꾸 뒤에 서 있는 거야. 이리 와.” 과묵한 성품인 이 회장의 한마디에 OOO사장은 그룹 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80년대. 당시 삼성전자에서는 밖에서 온 사람에 대한 텃세가 대단했다. 그러자 이 회장은 미국에서 영입한 반도체 전문가의 연봉을 CEO보다 높게 책정해 버렸다. 이처럼 이 회장은 인재들이 ‘뜰’ 수 있도록 조직 분위기를 만들어 간다. 힘을 실어줄 때는 과감히 실어준다.

이 회장의 인재 키우기 방법 중 또 하나는 과감한 보상이다. 사실 삼성은 내부 경쟁이 매우 치열한 조직. 이는 1등에 대한 엄청난 보상, ‘남들만큼만 해서는 안 된다, 남보다 더 잘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갖게 만드는 조직 문화의 산물이다. 임원 승진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경쟁이 치열하지만 일단 임원만 되면 확실한 대우를 해준다. 올해 삼성전자 등기 임원(총 7명)의 연간 총 보수 한도는 500억원. 매년 분야별로 뽑는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수상자에게는 5000만원의 상금과 1계급 특진을 부여한다. 이 회장은 이 상 수상자 선발 자료만큼은 직접 꼼꼼히 검토하고, 시상도 직접 한다.

또 학벌, 지연을 절대 못 따지게 한다. 삼성에서는 동창회, 향우회 결성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분위기다. 또 패자부활전을 강조한다. 수년 전, 이 회장은 사장들을 모아 놓고 종합비타민제를 나눠줬다.

“여러분 중 회사에 수백억 손해 끼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몸이 아프면 제가 손해입니다. 실패한 경험에서 많이 배웠을 테니 이제 약 잘 먹고 건강관리 잘해서 실패를 만회해 주세요.”

▼이건희 회장의 인재론 ▼

① 창의성을 갖춰야 한다

② 긍정적 이어야 한다

③ 인간미가 있어야 한다

④ 말보다 행동이 먼저다

⑤ 도전정신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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