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보다 힘든 재건…포연은 걷혔지만 '내일'이 안보인다

  • 입력 2003년 6월 29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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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 과도정부가 들어선 지 1년, 이라크전쟁이 끝난 지 50일이 지났다. 미국은 아프간과 이라크 국민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했지만 이들 나라에 약속된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한 나라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일은 전쟁보다 훨씬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전쟁 후 아프간과 이라크의 현실을 통해 점령국 미국이 취하고 있는 국가재건 작업의 현주소를 짚어 본다.

곽민영기자 havefun@donga.com》

▼過政 ‘비실비실’▼

13일로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지 1주년이 됐지만 현실은 1년 전 그대로다.

헌법 제정 작업은 당초 시간표보다 두 달 가까이 미뤄졌다. 9월 헌법초안 작성, 10월 로야지르가(부족대표회의)를 거쳐 내년 6월 총선을 통해 정식 정부를 구성한다는 계획이지만 유권자 파악을 위한 인구조사조차 안 된 상태다. 정부 형태나 의회 구성에 대해서도 결정된 것이 없다.

그러나 모든 논의를 진두지휘할 카르자이 대통령은 ‘카불(아프간 수도) 주지사’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 지역 군벌들이 정부군(5000명)의 20배에 달하는 무장병력을 거느린 채 중앙정부에 조세권이나 군통수권 등 주요 권한을 넘기지 않고 있기 때문.

카르자이 정부는 1억5700만달러의 해외원조를 받아 7월 1일 군벌을 무장해제하고 이들을 정부군으로 편입하기 위한 3개년 계획에 돌입한다고 발표했지만 난관이 많다. 무장해제를 주도할 국방부가 또 하나의 군벌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세력들이 무기를 놓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앙 정부의 장악력이 떨어지다 보니 기초 치안이 엉망이다. 탈레반 잔당 소탕작전과 군벌간 충돌, 각종 폭발사고로 매일같이 사망·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탈레반 잔당의 폭탄 테러 등으로 지금까지 19명의 평화유지군이 숨졌다.

최근 영국 일간 가디언은 르포 기사에서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살아남은 것이 축복인 곳’으로 아프간의 일상을 표현했다.

군경 병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평화유지군 5400명의 활동은 말 그대로 ‘교통정리’ 수준이라는 게 구호단체 관계자들의 평가다. 평화유지군 비율을 보면 분쟁지역이었던 코소보에서 인구 48명당 1명, 동티모르에서 86명당 1명인 데 비해 아프간에서는 5380명당 1명에 불과하다.

민생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평균수명은 2001년 43.1세에서 2002년 46.6세로 올랐고, 1000명당 영아사망률도 2001년 165명에서 2002년 144.76명으로 호전됐다. 2002년 농업생산량도 2001년보다 82% 늘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한 치안과 국제사회의 관심 부족이 경제, 민생 회복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ADB는 분석했다. 벨기에 브뤼셀 소재 ‘국제위기그룹’의 파키스탄 지부장인 사미나 아흐메드는 최근 DPA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국제사회가 아프간이 이제 통제되고 있다고 믿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미르 모하메드 아민 파랑 아프간 재건장관은 “국제사회는 45억달러를 원조하기로 했지만 전쟁 이전으로 돌려놓는 데만 180억∼200억달러가 든다”고 말했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최근 영국을 방문, 150억달러의 지원을 요청했다.

▼軍政 ‘갈팡질팡’▼

미국 국무부는 24일 “이라크를 중동의 민주주의 모범국가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종전 두 달이 다 돼가는 이라크의 재건 작업은 미국의 시행착오만 반복될 뿐 뚜렷한 성과가 없다.

미국은 종전선언 보름 만에 재건 사령탑을 교체하는 시행착오를 겪은 뒤 폴 브레머 최고 행정관에게 재건작업을 맡겼다. 그러나 브레머 행정관 역시 과도정부 구성을 담당할 25∼30명의 자문위원회 구성을 둘러싸고 현지인과 마찰을 빚으면서 과도정부 수립 착수 작업이 늦어졌다. 당초 계획보다 두 달 이상 늦은 7월 중순 이후로 미뤄진 것.

브레머 행정관은 각 정파와 부족 대표가 참여하는 거국적 기구에 과도정부 수립을 맡기겠다고 했다가 미국이 직접 위원회를 인선하겠다고 번복하면서 현지인의 불만을 샀다. 미군 주둔을 지지하던 시아파까지 자치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반미시위를 벌였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이에 따라 26일 존 햄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소장 등 전문가 5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이라크에 파견, 전략 재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재건 일정이 미뤄지는 주된 이유는 사담 후세인 추종 세력의 게릴라식 반격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후세인 잔당들은 외국 용병까지 포섭, 조직화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5월 이후 현재까지 이라크 주둔 14만6000명의 미군에 대한 게릴라식 공격으로 모두 23명이 사망했다. 사고사까지 합치면 63명이 목숨을 잃었으니 이는 전쟁 중 사망한 138명의 절반에 육박한다. 27일 밤에는 무장괴한들이 미군 차량 행렬을 공격, 미군 1명이 숨지고 4명이 다친 데 이어 28일에는 미군 2명이 실종 3일 만에 숨진 채로 발견됐다.

영국군도 24일 페다인 민병대와의 교전에서 6명이 숨졌다.

워싱턴 포스트는 19일 이라크 잔당의 공격이 잇따르면서 이라크 주둔 미군이 갈수록 좌절감에 빠져 전후 평화유지 역할에 환멸까지 느끼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력 등 기초 시설이 복구되지 않아 곧 다가올 혹서(酷暑)가 우려되며 열악한 보건상태 때문에 전염병 발생 가능성도 높다.

국제 분쟁지역 지원단체인 국제위기그룹(ICG)은 “치안과 전력 식수 보건 고용문제 등 기초 민생 현안에 대해 연합군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서 “이 때문에 미국이 ‘이라크 국민 해방’보다는 ‘정권 교체’를 노렸다는 적대감만 심어주고 있다”고 밝혔다.

치안 부재가 계속되면서 경제 재건도 진전이 없다. 막대한 재건 비용의 주 수입원이 될 이라크 석유 수출이 22일 재개됐지만 저항세력들이 송유관을 파괴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그나마 조성된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파괴도 이어지고 있다.

보다 못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연합군은 이라크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단계별 이행안을 마련하라”고 촉구하고 나선 상황이다.

곽민영기자 havef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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