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노블리안스]김태한/中企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

  • 입력 2003년 6월 29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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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코스닥 기업 몇 개를 거느린 촉망받는 중소기업의 대표를 만났습니다.

40대 초반인 이 분은 얼마 전부터 ‘사장’ 대신 ‘회장’ 직함을 쓰고 있는데 그 사연이 기가 막혔습니다. 불합리한 관행을 견디다 못해 ‘2선’으로 물러났다는 얘기였습니다.

우선 대기업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중소기업 사장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답니다. 이 회사는 자동차, 통신 분야의 대기업에 부품을 납품하고 있는데 ‘협력사 사장단 모임’을 핑계로 한 대기업의 호출이 너무 많더라는 것이죠. 이런 자리는 대기업 담당 임원으로부터 일장훈시를 듣거나 협력업체의 자세에 대한 ‘정신교육’을 받는 일이 대부분이랍니다.

담당과장이 협력업체 사장을 불러 골프나 술자리를 요구하는 곳도 있답니다. 이런 일에 시간을 빼앗기다 보니 정작 경영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자신은 사장 자리를 내놓고 회장으로서 경영에 전념하는 고육지책을 쓰게 됐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는 또 환경사범으로 구속될 뻔한 얘기도 털어놓았습니다. 좁은 작업장에서 한 직원이 스위치를 잘 못 건드려 집진장치 한 대가 꺼진 것을 모르고 있다가 단속반에 걸린 것이죠.

며칠 뒤 ‘간단히 조사 받고 가라’는 통지가 왔답니다. 비록 실수라도 잘못이 있으므로 벌금은 각오하고 검찰에 나갔답니다. 그런데 웬걸, 담당검사가 덜컥 구속 지시를 내리더랍니다. 크고 작은 실수로 함께 출두한 중소기업 대표 10여명도 줄줄이 포승줄에 묶였답니다. 해외 협력사업과 주주들이 눈 앞에 떠올라 안되겠다 싶었답니다. 사정 반 읍소 반으로 검사에게 매달려 고의가 아님을 며칠 안에 입증키로 하고 풀려났답니다. 다행히 이 회사는 집진시설에 전기계량기를 달아 그날 하루만 집진기 한 대가 멈춘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네요.

그는 자신이 “중소기업 대표가 아니라 외국기업이나 대기업 대표였더라면 이런 대우를 받았겠느냐”며 “이러다가는 중소기업의 씨가 마르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성실한 기업인들이 기를 펴고 살 수 있어야 경쟁력 강화나 장기 성장도 가능하겠지요.

김태한기자 freewi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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