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제성호/새 특검법 흥정대상 아니다

  • 입력 2003년 6월 27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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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끝난 대북 송금 의혹사건에 대한 특별검사 수사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우리를 무척이나 우울하게 만든다.

우선 특검 수사가 정점으로 치닫게 되자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와 수사기간 연장을 저지하려 한 구 여권의 움직임은, 모시던 주군(主君)이 정치적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충성심의 표시에 다름 아니었다. ‘법치’를 경시하는 우리 사회의 정치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송두환 특검팀의 수사기간 연장요청을 거부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내년 총선을 의식한 무리수요, 국민적 의혹을 덮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에 동조하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마땅히 특검의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존중해 주었어야 했다.

특검팀이 발표한 수사결과는 햇볕정책의 순수성과 도덕적 기반을 뿌리째 흔들기에 충분하다. 북한에 송금된 뒷돈의 성격에 대해 특검은 사실상 남북정상회담의 대가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돈을 주고 남북정상회담을 산 것’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됐다.

이 같은 결과는 국민의 정부가 자초한 것으로, 몇몇 권력 엘리트들에 의존해 밀실에서 대북정책을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추진한 데 기인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적 합의, 적법절차 준수, 국회의 적절한 통제를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목적이 좋으면 이를 위한 수단과 방법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해 민주사회의 기본원칙인 절차적 적법성을 무시했다. 게다가 박지원 임동원씨 등 햇볕정책의 전도사들은 한결같이 정상회담 대가로 북한에 한푼도 준 일이 없다고 공언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밝혀질 거짓말을 거침없이 해댔던 것이다. 국민을 이처럼 우습게 여기며 속이려 했던 부도덕성은 지금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던 김대중 정부가 대북정책에 대기업을 끌어들여 공모관계를 유지한 것은 새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정상회담 준비과정에서 드러난 각종 탈법과 비정상, 권력남용은 모두 국회의 참여와 견제를 배제한 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구 여권은 햇볕정책의 과오를 반성하기는커녕 정부의 대북 지원금이 평화비용, 통일비용이라는 등 자기정당화에 급급하다. 그러면 왜 적법절차를 거쳐 남북협력기금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또 왜 정권 말까지 송금사실을 숨기려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동서독 사례를 들어 대북 비밀송금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 서독은 동독과 협력하거나 지원할 때 상호주의 정신에 입각, 동독인권 개선이나 동서독 긴장완화 등과 연계해 추진했다. 지원방식과 규모, 지원목적이 모두 투명했고 반드시 여야간의 합의를 선행시켰다. 일종의 뒷거래인 정치범 석방거래(Freikauf)도 사전에 야당 수뇌부에 통보한 후 실시했다.

한편 불법적인 대북 뒷거래를 통치행위론으로 정당화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진보세력을 자처하는 여권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에 일종의 연민마저 느끼게 한다. 대북 송금 의혹사건 특검은 밝혀지지 않은 의혹들이 너무 많은 미완의 특검이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정상회담을 전후한 모든 대북 송금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것이 여론의 대세다. 현재 한나라당은 새 특검법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다. 야당의 새로운 얼굴이 된 최병렬 대표도 제2의 특검 수용을 요구하고 있어 정부와 한판 치열한 격전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지금 150억원 수수의혹에 대해서만 특검을 수용하겠다고 미리 선을 긋고 있다. 올바른 남북관계 형성 등 민족의 장래에 관한 문제를 마치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 같다. 이러한 자세는 정도(正道)가 아니다. 대통령이 정치적 고려를 배제하고 원리원칙대로 접근해 주길 바란다. 그것이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사는 길이며, 왜곡된 남북관계를 바로잡는 첩경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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