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부엌의 철학…' 철학은 요리다

  • 입력 2003년 6월 27일 17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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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의 철학’ 저자인 프란체스카 리고티는 철학과 요리라는 이질적 영역이 갖는 욕망과 과정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19세기 프랑스에서 발간된 ‘미식가들의 연감’에 실린 삽화 ‘미식가의 서재’.사진제공 향연
‘부엌의 철학’ 저자인 프란체스카 리고티는 철학과 요리라는 이질적 영역이 갖는 욕망과 과정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19세기 프랑스에서 발간된 ‘미식가들의 연감’에 실린 삽화 ‘미식가의 서재’.사진제공 향연
◇부엌의 철학:철학과 요리 그리고 미식가적 이성 비판/프란체스카 리고티 지음 권세훈 옮김/184쪽 9900원 향연

20세기의 회화를 연 프랑스 화가 세잔은 ‘자연이야말로 화가의 유일한 스승이며 화가는 항상 자연에 충실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정작 그의 그림에는 자연의 흔적이 거의 없고 도형에 가까운 기하학적인 형상들만 채워져 있다. 세잔을 둘러싼 미술사가들의 모든 관심은 현실 모습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세잔의 그림과 그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가에 맞추어졌다. 가장 그럴싸한 대답은 엉뚱하게도 ‘현상학’이라는 낯선 철학이 내놓았다.

이 책은 세잔의 그림만큼이나 서로 닮지 않은 두 개의 영역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유사성을 갖는가에 주목한다. 철학과 요리가 그것이다. 철학이 가장 고상하고 추상적인 정신적 활동과 관계가 있다면, 요리는 그저 배고픔을 채우는 음식의 생산과 관계가 있다. 얼핏 보면 두 활동은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요리가 육체의 배고픔을 채우는 활동이듯 철학은 정신의 배고픔을 채우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는 전제에서 논의를 출발한다. 요리가 갖가지 재료들을 잘게 썰어 볶거나 끓여서 음식이라는 최종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라면, 철학은 여러 텍스트와 자료를 분석하고 새롭게 종합함으로써 새로운 지식이라는 성과물을 만드는 것이다.

철학과 요리의 메타포(은유)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이 주는 신선함과 감동은 철학자들의 철학적 태도와 요리에 대한 그들의 견해 사이에 발견되는 연관성에 관한 언급이다. 가령 갖가지 야채에 가벼운 소스만 얹어 다채로운 맛을 내는 샐러드가 다양성에 초점을 둔 요리라면, 모든 재료를 끓여서 걸쭉한 국물로 우려내는 수프는 통일성에 초점을 맞춘 요리다. 다원주의를 표방하던 이오니아학파와 일자(一者)를 고집하던 엘레아학파의 대립은 요리의 은유 속에서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또 우리는 플라톤이 음식이나 요리 자체를 정신적 활동과 무관한 비천한 것으로 폄훼한 사실에서 이데아에 집착한 그의 철학적 특성을 간파할 수 있다. 커피를 해롭다고 멀리하면서도 요리의 미덕을 예찬한 칸트의 태도에서는 냉엄한 이성주의 외에도 낭만주의에 곁다리를 걸치고 있는 그의 철학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철학자는 어떤 요리사가 되어야 할까?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철학자는 다른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는 요리사가 아닌 그들의 입맛을 바꾸어 놓는 요리사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책은 철학과 요리라는 별개의 영역에 속한 이질적 재료를 융합하여 독자들의 입맛을 한 단계 높여 줄 수 있는 인문학의 새롭고 독특한 퓨전 음식을 제공한다.

박영욱 고려대 강사·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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