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선구/정부에 ‘不法용서’ 권한 없다

  • 입력 2003년 6월 26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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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이 넘게 흐른 지금, 나는 출범 당시 이 정부에 걸었던 희망의 대부분을 거둬들였다. 그동안 새 정부의 새로운 원칙을 보았기 때문이다. 두산중공업의 노사분규, 철도노조의 파업, 화물연대의 파업,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의 실행을 둘러싼 교육부와 전교조의 줄다리기, 그리고 얼마 전 타결된 조흥은행 노조의 파업에 이르기까지 나는 분명 보았다. 목소리를 크게 낸 자가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더구나 국민의 안위와 재산을 볼모로 잡을 수 있는 효과적 무기를 가진 자들은 더 많이 얻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는 그 어떤 ‘법과 원칙’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NEIS 시행을 둘러싼 잡음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에도 이 정부는 목소리를 크게 내는 진영을 따라 오락가락했으니까 그 원칙(?) 하나만은 예외 없이 지킨 셈이다.

▼‘목소리 크면 승리’가 원칙? ▼

교육부가 전교조의 요구대로 NEIS의 보완을 합의해 준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말했다. “그래도 수많은 (전교조) 교사들이 직장에서 쫓겨나는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는 있지 않았느냐”고. 조흥은행 노조의 파업이 타결된 이후, 노 대통령은 또 말했다. “조직화된 폭력이 아니라 일시적인 폭력이라면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맞다”라고. 그렇다면, 도둑이 가족 중 한 사람을 인질로 잡고 재산의 반을 내놓으라고 할 때에도 정부는 단지 일시적인 폭력일 뿐이라며 합의를 종용할 셈인가. 만약 많은 사람이 삼청공원에 모여 “노 대통령 물러가라”며 ‘연가투쟁’을 벌인다면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해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던 그 심정으로 그만 물러날 셈인가. 노 대통령은 왜 모를까. 수많은 교사들이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정부가 ‘법과 원칙’을 자의적으로 무너뜨릴 때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앞으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은 그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대통령이 “공권력 투입은 국민의 신체나 재산, 생명이 급박한 위기를 당할 때에나 필요한 것”이라고 밝힌다면 앞으로의 파업들은 하나같이 그 수준으로 치닫게 되리라는 것을. 이러는 것은 어떨까. 정부의 모든 시책은 시행되기에 앞서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의 ‘승인’을 받게 하는 것. 어차피 들어 줄 것들이라면 구태여 이렇게까지 시끄럽게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엊그제, 대북 비밀 송금에 대한 특검 수사기간 연장이 청와대에 의해 거부된 지 하루 만에 적어도 1억달러라는 돈이 정부의 몫으로 북에 건네졌음이 밝혀졌다. 특검은 이를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대가성이 강한 것으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여당 의원들은 이를 통일비용 평화비용으로 규정하고 나아가 대북 송금을 더 파헤치는 것은 ‘국익’을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그게 과연 국익일까. ‘법과 원칙’을 무시한 채 평화를 암거래하는 것이 국익이란 말인가. 그렇게 얻은 평화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한 나라의 ‘법과 원칙’이란 그런 허상일 뿐인 평화보다 더 가치 있고 무거운 것이다.

▼불법행동 자의적 해석 말아야 ▼

분명한 것은,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은 이 정부에 ‘법과 원칙’을 적용하고 집행할 권한을 부여한 것이지, 그 ‘법과 원칙’을 맘대로 만들고 해석할 권한까지 부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법과 원칙’을 깨고 불법적 행동에 나서는 집단이나 사람들을 용서하고 말고 할 권한을 부여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제대로 된 ‘민주정부’란 ‘법과 원칙’을 세움에 있어서는 민주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을 적용하고 집행함에 있어서는 그 엄격함이 추상과도 같아야 한다.

제대로 된 ‘참여정부’란 ‘법과 원칙’을 만드는 일에 보다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킬 때 얻어지는 것이지, 그 ‘법과 원칙’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일에 보다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려 할 때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이 정부는 빨리 깨달아야 한다.

김선구 서울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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