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두렵죠, 또 한번 실패하면…" 30대의 재혼

  • 입력 2003년 6월 26일 16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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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어느 토요일 오전 이미현씨(가명·33·여)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결혼식은 몇 분 남지 않았다. 상대는 부모의 권유로 6개월 전에 선을 본 남자. 소위 ‘사’자가 들어간 직업에 인물도 집안도 나무랄 데 없었다. 다만 불같은 사랑의 감정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괜찮아. 살다 보면 정이 들 거야. 우리 엄마, 아빠처럼 잘 살 수 있을 거야. 할 수 있어.’

98년은 김무선씨(가명·34·M미용실 사장)에게 잊지 못할 해였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미용기술을 배워 갖은 고생 끝에 미용실을 차렸고 7년간 연애한 여인과 결혼도 했기

때문이다. 아내 주변에서 김씨의 학력과 집안환경을 놓고 말이 없지는 않았지만 김씨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난 성실하고 씀씀이도 헤프지 않다. 근면하다. 술 담배 도박은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난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운명은 이씨와 김씨에게 얄궂었다. 98년과 2001년 두 사람은 각각 이혼했다.

통계청은 지난해 14만5300쌍이 이혼을 했다고 발표했다. 2001년 13만5000쌍보다 1만300쌍이 늘었다.

30대 이혼은 남성 1000명 중 26.3건, 여성 1000명 중 29.9건 꼴이었다. 다른 나이 대에 비해 가장 많았다.

지난해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재혼 회원은 모두 5934명. 이중 30대가 3492명으로 전체의 58.8%를 차지했다.

98년 이후 30대 회원은 매년 1.5∼2.5배씩 늘었다. 황혼 이혼이나 장성한 자녀를 둔 중장년의 재혼이

이슈가 되는 이 시대의 이면에는 가장 많이 이혼하면서 조용히 재혼을 준비하는 30대들이 있다.

2003년 6월 이씨와 김씨도 재혼을 준비하고 있다. 아이는 없다. 잘 될 거라 믿고 싶지만 두려움이 없지 않다.

재혼을 생각하는 30대 남녀 6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만남

97년 2년여의 결혼생활을 마감한 정연주씨(가명·34·여·미술학원 강사)의 어머니는 지난해 한 결혼정보업체 재혼회원으로 딸을 가입시켰다. 이혼한 뒤 남자 만나기가 두려웠던 정씨는 재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이후 10여 차례 남성들을 만났다.

“재혼을 마음먹었다면 적극적으로 해야 되요. 인터넷 동호회 등에 가입하든지 저처럼 중매업체를 이용해야지요. 가만히 있으면 여성들에겐 전혀 기회가 없어요.”

이혼한 지 4년 되는 김경미씨(가명·35·여·학원 강사)도 다른 결혼정보업체에 지난해 가을 가입해 10번 정도 맞선을 봤다.

“학원에서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과 학부모밖에는 만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소개가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 자체가 좋지요.”

이혼한 사실을 내놓고 알리는 30대들은 거의 없다. 말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떳떳이 말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대부분 일부러 드러낼 것까지야 있겠느냐는 태도다.“오죽했으면, 쯧쯧…”하는 주위의 시선이 달갑지 않아서다. 그것이 동정이라고 해도 말이다.

남자들은 여자보다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올 1월 13년의 결혼생활을 마감한 이용진씨(가명·38·외국계 회사 과장)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자마자 부서장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다니는 두 딸을 돌보려면 퇴근하고 바로 집에 가야 했어요. (이혼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면 부서장들이 ‘갑자기 이 과장 왜 저래’ 하고 의문을 품었겠지요.”

이씨는 이혼 사실을 알린 뒤 직원들이나 거래처 사람들이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는것 같다고 말했다.

직업상 다양한 나이대의 여성들을 만날 기회가 있는 김무선씨는 자신을 ‘결혼한 적은 있지만 솔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씨는 여성과의 관계가 무르익을 것 같을 때마다 (김씨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의 눈빛만 이상해져도”) “나는 이혼남”이라고 밝힌다고 했다.

김씨는 “이혼한 사실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잘못도 아니고 속일 것도 아니다”라며 계면쩍게 웃었다.

●불안

7세 딸과 함께 살고 있는 백영선씨(가명·34·여·프리랜서)는 2001년 초 이혼한 뒤 아직까지 재혼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다시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요. 결혼이 양가의 만남이라고 하지만 아니에요. 여자가 시댁으로 가는 거죠. 그 생활을 다시 할 자신이 없어요.”

백씨는 이혼의 상처를 “심장에 근육이 생기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백씨뿐 아니라 재혼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첫 결혼의 실패는 두려움으로, 자책으로, 후회로 남는다. 물론 첫 결혼의 경험이 새사람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는 하지만 재혼 욕구와 ‘또 실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항상 붙어 다닌다. 40, 50대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에 이들은 또 헤어질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정연주씨는 전 남편의 음주와 폭력이 이혼의 이유가 됐다.

“새 가정을 꾸리면 끝까지 가야죠. 또 실수를 하면 주위에서 ‘저 여자 인격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냐’하는 시선으로 볼 텐데….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정씨는 새로운 남성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도 어려워졌다고 했다.

“초혼 때에 비해서 사람에 대한 불신이 커졌어요. 어떨 때는 믿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어져요.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곧 마흔이 되는 이용진씨는 이혼은 불효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들한테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재혼을 하겠다고 하면 부모님께서 ‘잘 할 수 있겠니’ 그러실 겁니다. 신뢰를 어느 정도 잃어버린 거죠. 기분은 좀 언짢지만 자식 된 도리를 못한 건데 용서를 빌어야죠. 더 나은 모습으로 보답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자녀

김경미씨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았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별거를 시작할 때 김씨가 아이들을 맡았지만 99년 정식 이혼을 하면서 남편에게 보냈다. 양육권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이혼이 더 절실한 상황이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에게는 가혹한 현실이지만 만약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김씨는 결혼정보업체에 회원으로 등록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재혼을 원하는 30대, 특히 여성에게는 큰 짐이 된다. 미취학 아동들이 대부분이어서 교육비 부담이 클 뿐 아니라 피가 다른 형제에 대한 애정 배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정연주씨는 아예 아이를 갖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된 남편의 술버릇과 폭력 때문에 아이까지 갖게 되면 생활을 감당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계획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잘 됐어요. 있었다면 아이도 큰 충격을 받았을 테지요.”

결혼정보업체 듀오가 올해 재혼희망자 314명(30대 24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재혼상대의 자녀를 받아들이겠느냐’는 질문에 남자는 40.1%, 여자는 44.3%가 ‘같이 살지 않겠다’고 답했다.

백영선씨는 팔순을 앞둔 아버지와 올해 초 2주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지의 한 술집에서 아버지는 7남매 중 막내딸인 백씨에게 “아이를 보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네가 능력이 있고 잘 살 거라고 믿지만 아이를 데리고는 힘들다. 정말 너를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백씨는 딸아이를 떠나 보내고 얼마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버지만 꼭 껴안고 말았다.

“솔직히 재혼을 한다면 내 딸이 그 남자에게 사랑을 받을까, 만약 애를 낳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이 많습니다.”

●상대

김무선씨는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하지 않았다. 볼 것 없는 집안에 학력도 짧아 좋은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더하여 서울 청담동 로데오거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김씨에게는 여자를 만날 수 있는 루트가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씨는 지금 ‘물색’ 중이다. 초혼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랑만 보지 않고 가족과 주변을 본다는 것.

자기보다 열네 살 어린 여성도 만나 봤고 금전적 이익을 위해 접근하는 여자도 있었다. 그는 만약 마음에 드는 여성의 부모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만 두겠다고 말했다. 열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결혼생활을 위태롭게 할 사소한 어떤 것도 배제하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아직도 전처 주변사람들이 자신의 결혼생활을 방해했다고 생각한다.

이미현씨는 결혼식을 올린 지 석 달 만에 별거에 들어갔다. 당연히 아이도 갖지 않고 이혼을 했다. 2년여의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자들과 어울릴 만한 자리엔 되도록 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좋아지면 내가 초혼이 아닌 얘기를 구구절절 해야 할 텐데 자존심 상하잖아요. 만약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쪽 집안에서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고요.”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는 이씨는 이혼했다는 사실 말고는 빠질 것 하나 없는 자신이, 정말 놓치기 싫은 남자를 만나서도 접근도 못하고 마음속에서 지워야 할 때마다 속이 너무 상한다.

정연주씨는 이혼녀와 초혼남의 결혼을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재혼을 생각하니 마음이 변한다고 했다.

“한번 실패했던 삶에 대해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내가 결혼해도 기죽거나 주눅 들지 않을 사람을 찾게 돼요.”

●가치

김경미씨는 혼자 사는 것이 너무 외롭다고 했다. 밥하고 빨래하는 이유가 오로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이런 생활을 앞으로 50, 60살이 될 때까지 해야 된다는 생각이 참기 힘들다고 했다. 이미현씨는 올 초 온 가족이 떠난 여행에서 언니들이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 챙기는 모습을 보고 참 부러웠다고 했다. 김무선씨는 누군가와 가정을 꾸려야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고 했다.

재혼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재혼의 가치를 ‘화목한 가정’에서 찾았다. 첫 결혼에서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

전 남편의 음주와 폭력에 충격을 받았던 정연주씨는 “자신의 일 다음으로라도 가정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용진씨는 최근 한 이벤트를 통해 마음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 그 여성은 지방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첫 결혼 때 아내와 자주 떨어져 있었던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 이씨는 아내와 꼭 같이 살겠다고 했다.

이씨는 “만약 이 여성과 결혼을 하면 지방에 내려가 햄버거 가게를 할지언정 서로 떨어져서 살지는 않겠다”며 웃었다.

이들은 성공적인 재혼에서 경제력을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 10, 20대도 아니고 곧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 사랑만 있으면 다 된다는 이야기가 어처구니 없는 환상이라는 것도 경험했다. 되도록 미래가 확실한 전문직을 선호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경미씨는 이혼은 선택이 아니라고 말했다. 결혼 생활을 더 버틸 수 없기에, 살려고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에게 재혼은 첫사랑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경험은 되기 어렵다. 아귀가 딱 맞아야 결합되는 장난감 블록처럼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배우자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더 이상의 실패는 있을 수 없다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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