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25>2부 ⑦검찰과 권력의 유착

  • 입력 2003년 6월 25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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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6월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검사장회의에서 DJ와 신승남 검찰총장이 건배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1년 6월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검사장회의에서 DJ와 신승남 검찰총장이 건배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검찰이 ‘20억원+α’ 비자금을 수사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집권했습니다.”

97년 11월 6일 김대중(金大中) 국민회의 총재의 경기 고양시 일산자택으로 달려온 최택곤(崔澤坤) 총재특보는 응접실에 들어서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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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김태정(金泰政) 검찰총장, 박순용(朴舜用) 대검중수부장, 임휘윤(任彙潤) 대검공판송무부장 등 검찰간부들과 접촉해 확인한 DJ비자금 수사 유보 방침을 곧바로 보고한 것이다. 검찰의 공식발표(11월 22일)보다 보름 이상 앞선 정보였다.

최택곤의 설명.

“당시 김태정 박순용 임휘윤은 DJ비자금 수사 유보를 위한 논리 개발에 적극 참여했다. 그런 점에서 같은 배를 탄 운명이었다. 특히 김태정(전남 장흥군)과 임휘윤(전북 김제시)은 호남 출신이란 점에서 뜻이 통했다. 박순용은 영남 출신이기는 하지만 장인이 DJ와 목포상고 동문이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비자금 수사 유보 결정 소식을 보고하면서 ‘이들 3명은 공신입니다. 집권하면 중용해야 합니다’고 하자 DJ는 ‘알겠네’라고 다짐했다.”

이 다짐대로 이들 3명은 DJ정부 출범 후 승승장구했다. 김태정은 99년 5월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됐고 박순용은 서울지검장 대구고검장 검찰총장을 차례로 거쳤다. 임휘윤도 대검강력부장 서울지검장을 거쳐 부산고검장까지 올랐으나 2001년 10월 ‘이용호(李容湖) 게이트’에 연루돼 옷을 벗었다.

최택곤이 전하는 또 다른 후일담.

“DJ정부가 출범하자 임휘윤은 대검공안부장을 원했다. 그러나 김태정은 공안부장에 진형구(秦炯九)를 임명했다. K2(경복고) 출신인 진형구는 YS정권 때 자신을 김현철(金賢哲)에게 소개시켜 결과적으로 검찰총장이 될 수 있도록 해준 은인이기 때문에 공안부장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김태정은 의리를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DJ정부의 검찰은 이처럼 출발부터 정치권력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특히 정권과 검찰의 호남 실세들은 유착을 되풀이하면서 인사는 물론 개별사건 수사에까지 깊숙하게 관여했다.

한 정치권 관계자의 설명.

“DJ정권 초기, 검찰총장 물망에까지 오르던 호남 출신 모 검찰인사가 DJ의 장남 김홍일(金弘一) 의원, 차남 홍업(弘業)씨, 아태재단 이수동(李守東) 상임이사 등과 어울리는 모습을 몇 차례 목격한 일이 있다. 그 검찰인사가 나중에 고위직으로 출세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검찰 내에서는 호남인맥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정권이 끝나기 전에 요직에 올라야 한다는 조급함이 호남 출신 검사들간에 치열한 경쟁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2001년 5월 출범한 신승남(愼承男·전남 영암군) 검찰총장체제가 그 계기였다. 신승남의 총장 기용 자체가 논란이었다.

2001년 5월 박순용 총장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비서실에서는 신승남 대검차장을 후임 총장 1순위로 한 인사안을 DJ에게 보고했으나 DJ는 이를 즉각 재가하지 않고 며칠을 미뤘다.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 출신의 한 인사는 “DJ는 신승남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법무부 장관 김정길(金正吉·전남 신안군)과 신승남이 같은 호남 출신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다른 총장후보를 찾아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장관을 교체키로 했지만 DJ는 신승남을 총장에 임명한 뒤에도 ‘안심이 안 된다’며 의구심을 드러내곤 했다”고 말했다.

신승남에 대한 DJ의 못마땅한 심기는 역설적으로 검찰 내 호남 실세간의 갈등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다. DJ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P씨는 “신승남으로서는 DJ의 신임을 보충하기 위해 권력실세들과 협력을 더욱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각기 나름대로 DJ의 신임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호남 출신 검찰 실세들도 덩달아 줄잡기 경쟁에 나서면서 결과적으로 총장을 흔드는 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2001년 후반기에는 신승남(사시 9회), 신광옥(辛光玉·광주·사시 12회), 임휘윤(사시 12회)간의 ‘3자 갈등설’이 설득력 있게 나돌았다.

실제 1800만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2001년 12월 구속된 신광옥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측은 “신승남이 임휘윤을 죽이더니 나까지 죽이려 한다”고 주장해 이런 갈등설을 뒷받침했다. ‘임휘윤을 죽였다’는 것은 임휘윤이 서울지검장 재직 때인 2000년 5월 이용호를 긴급체포했다가 풀어준 것이 문제가 돼 2001년 10월 부산고검장직에서 물러난 사실을 가리킨 얘기였다.

검찰 주변에서는 “신광옥 임휘윤은 조기에 검찰총장을 하기 위해 신승남이 빨리 총장에서 물러나길 원했다. 그래서 신승남을 직간접적으로 흔들어댔다. 이에 신승남도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청와대 출신 K씨의 설명.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갈등설이 나올 소지는 있었다. 2001년 말 이용호 게이트 수사가 진행 중일 때 신승남의 동생 승환(承煥)씨의 게이트 연루 사실이 언론에 불거져 나왔다. 검찰에서는 검찰 외에 이를 알만한 곳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왔다. 신승남으로서는 신광옥을 의심할만했던 것이다. 한편 신광옥의 돈 수수 문제는 최초 ‘1억 수수’라는 제목으로 한 언론에 보도됐는데 당시 청와대측에는 이 언론사 간부와 신승남이 그 보도 직전에 만났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확인되지 않은 첩보였지만 신광옥도 신승남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었다.”

이에 앞서 신승남과 신광옥은 2001년 8월 민정수석실 국중호(鞠重皓) 행정관이 인천공항 유휴지 특혜개발 사건과 관련해 인천지검에서 구속된 사건을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청와대 자체조사 결과 국중호에게 죄가 없다고 판단한 신광옥은 신승남과 이범관(李範觀) 인천지검장에게 항의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국중호는 유휴지개발 공모에 참여한 업체 관계자에게서 2000달러의 여행경비를 받고 인천공항측에 전화를 해 관련사항을 알아봤다는 혐의로 뇌물수수 공무상비밀누설 업무방해죄가 적용됐으나 1심 재판에서 뇌물수수 공무상비밀누설 부분은 무죄가 선고됐다. 지금도 신광옥은 “검찰이 민정수석실을 흠집 내려고 무리하게 사건을 몰고 갔다”며 신승남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신광옥은 최근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술회했다.

“신승남 총장을 강력히 지원한 사람들은 김홍일 김홍업이다. 내 경우는 청와대에 근무할 때 권노갑(權魯甲) 민주당 고문, 한광옥(韓光玉) 대통령비서실장, 남궁진(南宮鎭)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의 도움을 받았다. 김홍일 김홍업이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검찰 내 호남인맥과 권력 실세간의 유착이 심화되면서 권력의 검찰에 대한 개입도 점차 노골화됐다.

2002년 1월과 7월의 최경원(崔慶元) 송정호(宋正鎬) 법무부 장관 경질이 단적인 예였다.

청와대 출신 K씨의 설명.

“임기 말이 되면서 청와대에서는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 김학재(金鶴在)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등을 중심으로 검찰 수사가 대통령 아들을 포함해 권력핵심 쪽으로 향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졌다. 이 연장선상에서 TK 출신인 이명재(李明載) 검찰총장에 대한 통제와 견제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제기됐다. 법무장관을 K1(경기고) 출신인 최경원에서 전북 익산시 출신인 송정호로 교체한 것은 장관의 인사권으로 검찰의 수사권을 견제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정호도 이런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청와대측은 송정호의 경질을 두고 ‘업무장악이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사실은 두 아들의 구속을 막지 못한 데다 ‘병풍수사’ 요청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그러나 권력과 검찰의 유착은 결국 권력 주변의 부패 소지를 차단하는 예방기능의 부재로 이어져 DJ정권의 몰락을 자초한 한 요인이 됐다.

▼DJ측 "신승남 때문에 망했다"▼

“신승남 검찰총장 때문에 DJ는 망했다. 두 아들이 감옥가고, 아태재단까지 넘기고….”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인척 L씨는 최근 지인을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토로했다.

‘이용호 게이트’에 대한 특검을 수용하는 바람에 DJ의 차남 홍업, 3남 홍걸(弘傑)씨가 구속되고 정권이 몰락의 길로 치닫게 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의 설명. “2001년 말 한나라당이 이용호 게이트에 대한 특검수사를 요구했을 때 DJ는 신승남을 청와대로 불렀다. 특검을 받아도 문제없겠느냐는 DJ의 물음에 신승남은 ‘특검을 해도 자신 있다’며 특검 수용론을 폈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였다. 나중에 들으니 당시 검찰은 관련자에 대한 계좌추적 등 기초 조사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무턱대고 특검을 받자고 했던 것이다.”

당시 신승남은 자신의 동생 신승환이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된 데서 벗어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전체적인 수사 상황을 면밀하게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신승남은 신승환이 이용호로부터 6000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자 2002년 1월 검찰총장직을 사퇴했다.

신승남은 자신도 억울하게 퇴임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DJ측의 입장에서는 신승남이 여간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청와대 출신의 한 인사는 “DJ가 2001년 5월 신승남을 검찰총장에 기용하면서 경질했던 김정길 전 법무장관을 2002년 7월 재기용한 것도 신승남에 대한 불만과 무관치 않다. 김정길은 애초 신승남의 총장 임명을 반대했던 사람이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 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홍찬선 김동원 박중현 김두영 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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