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 특검연장 거부]政治에 결국 밀린 特檢

  • 입력 2003년 6월 23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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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송금 특별검사 수사가 시종 ‘정치논리’에 휘둘리다 막을 내리자 정치권 안팎에서 “법 원칙이 정치논리에 의해 훼손되는 악 선례를 남겼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비등하고 있다.

대북 송금 특검은 나름대로 의욕을 갖고 출발했으나 5월 말 이근영(李瑾榮) 전 산업은행 총재와 이기호(李起浩)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구속되는 등 수사의 칼날이 점차 ‘몸통’으로 향해 가자 정치권의 외풍(外風)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특히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 가능성이 제기되자 민주당 정균환(鄭均桓) 원내총무는 “특검의 과잉수사는 남북화해에 대한 사법적 테러”라며 노골적으로 특검을 비난하고 나섰다. 곧 이어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할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까지 “남북관계를 해칠 만한 수사로 달려가지 않도록 하겠다”며 수사의 한계를 긋는 듯한 발언을 했다.

급기야 이 사건의 최종 당사자인 DJ까지 특검 수사에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문희상(文喜相) 대통령비서실장 등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이 ‘DJ 수사 반대’ 입장을 밝히고 나서면서 특검 안팎에서는 “특검은 뭐하러 시작했느냐”는 자조적인 소리까지 나왔다. 당초 3월 대북 송금 특검 협상 당시 ‘특검 수용 불가피론’을 내세웠던 민주당 이상수(李相洙) 사무총장 등 친노(親盧) 신주류들까지 이번에는 한목소리로 거부론을 주장한 것도 분위기를 몰아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권은 여야간에 특검법 개정 협상이 불발된 데다 남북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논거를 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어떻게 해서든 호남과 ‘햇볕정책’ 지지 세력 등 기존의 지지층 이탈을 막아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게 사실이다.

실제 여권 내에서는 “DJ가 지팡이 짚고 특검 사무실에 출두하는 장면이 TV를 통해 방영될 경우 신당이고 뭐고 다 끝장이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최근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과 만난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도 “법적으로 수사기간 연장을 거부할 명분이 없다”는 자신의 지적에 문 수석이 “말은 맞는데, 특검 연장은 곧 DJ 수사가 되기 때문에 너무 정치적 부담이 크다”며 곤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특검측은 수사기간 연장을 통해 150억원 의혹 사건을 조사하되, “DJ 조사계획은 없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이것 또한 정치논리를 앞세운 반대의 벽에 부닥치고 말았다.

성낙인(成樂寅·헌법학) 서울대 교수는 “이번 특검 역시 정치권의 입김에 좌우됐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150억원 의혹 사건을 일반 검찰이 수사할 경우 제대로 규명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며 “차제에 특검의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對北송금수사 향방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3일 대북 송금 특별검사의 수사기간 연장 요청을 거부하면서 ‘여야 합의에 의한 새로운 특검을 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노 대통령의 언급은 박지원(朴智元)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현대 비자금 150억원 수수 의혹에 대한 것이었다.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도 이날 추가설명을 통해 “새로운 특검을 할 경우 가급적 여야가 합의해주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 대상은 150억원 의혹 부분으로 한정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문 수석은 “특검에 대한 논의가 (국회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지나치게 시간 지나면 대통령이 (검찰에) 수사를 지시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해 150억원 의혹 부분을 검찰에 넘길 수도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24일 제출하려는 새로운 특검법안은 노 대통령의 생각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한나라당은 기본적으로 ‘150억원 수사’는 곁가지라고 주장한다. 한나라당은 이 같은 판단 아래 새 특검법안에 1차 특검법에 규정된 수사 대상을 다시 명시하고, 현대 비자금과 SK그룹을 통한 5억달러 대북 송금 의혹, 현대그룹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 및 금융권 손실 등을 수사 대상에 추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다. 또 이번 특검 파문을 거울삼아 1차 수사기간을 120일로 대폭 늘리고 필요시 30일을 추가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곁가지’가 아닌 대북 송금의 ‘본체’에 접근해 나가고, 필요하다면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도 해야 한다는 게 한나라당의 입장이다.

이해구(李海龜) 대북뒷거래조사특위 위원장은 “특검법(2조4호)에 대북 송금 사건과 관련한 청와대 등의 비리 의혹사건은 수사 대상에 포함되도록 명백히 규정돼 있다”며 150억원은 특검수사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은 이 같은 한나라당의 공세에 대해 “(한나라당이) 국정에 협력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국회는 국민을 위한 기구이지 정쟁의 도구나 범법행위자의 도피처로 악용돼선 안 된다”며 정면 대처 의지를 밝혔으며, 민주당 정대철(鄭大哲) 대표도 “야당의 정치공세가 있을 것이지만 우리 당은 경제와 민생 챙기기에 진력을 다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한나라당이 24일 새 특검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30일이나 다음달 1일 본회의 처리를 강행하더라도 노 대통령과의 이런 시각차가 해소되지 않는 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등 난관이 버티고 있어 언제쯤 새 특검 임명이 이뤄질지 현재로는 불투명하다.

제2의 특검법 논란이 장기화할 경우 대북 송금 사건은 특검의 손을 떠나 검찰이 맡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경우 검찰은 대북송금 의혹 전반이 아닌 150억원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수사력을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검찰은 150억원 의혹을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밝혀내지 못할 경우 검찰에 돌아올 비난여론을 은근히 걱정하는 분위기다. 수사 미진으로 또 다른 특검이 생겨날 경우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각계 반응▼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23일 대북 송금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송두환(宋斗煥) 특별검사팀의 수사기간 연장 요청을 거부한 것에 대해 법조계와 학계, 시민단체 등에서는 대체로 비난하는 가운데 일부 지지하는 의견도 나오는 등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허영(許營) 명지대 초빙석좌교수는 “특검법상 수사기간 연장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은 형식적 절차에 불과한데도 마치 대통령이 실질적 권한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 것은 법리적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임광규(林光圭) 부회장은 “특검제를 실시하는 근본 목적은 정치적 외압을 배제하고 법치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며 “대통령이 정치적 고려 때문에 특검 수사를 중단시키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성균관대 행정학과 김일영(金一榮) 교수는 “진상을 끝까지 규명한다고 해서 민족화해정책에 악영향을 준다는 논리 또한 국민 일반의 정서상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석연(李石淵·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 변호사도 “특검 수사는 독립성이 가장 중요한데 대통령이 연장 요청을 거부한 것은 특검의 독립성을 스스로 훼손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김석준(金錫俊) 공동대표는 “노 대통령이 대북 송금 특검을 일단 마무리하고 나머지는 개인비리 사건으로 몰고 감으로써 남북관계와 당내 입장에서 좀 더 자유로운 위치를 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최병모(崔炳模) 회장은 “특검 수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연장을 거부한 것은 남북관계의 특수성 등을 고려한 고심어린 선택”이라며 “추가 의혹 수사는 검찰이 담당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밝혔다.

조승현(曺勝鉉) 방송통신대 교수 등 ‘민족의 화해를 바라는 법학교수’ 76명은 성명서를 내고 “특검 수사가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민족의 화해를 저해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며 연장 거부를 지지하는 의견을 밝혔다.

경실련 고계현(高桂鉉) 정책실장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박지원(朴智元)씨가 받은 것으로 알려진 150억원에 대한 수사는 대북송금 문제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검찰이나 새로운 특검팀에서 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시민단체인 광주전남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상임대표 윤장현)은 이날 논평을 내고 “대북송금 특검이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과정에서 6·15공동선언의 정신을 훼손하고 민족 화해에 찬물을 끼얹어 왔다”며 “노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 연장을 거부한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

광주=김 권기자 goqud@donga.com

▼허탈한 특검팀▼

23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특검 수사기간 연장을 거부하자 특검팀 관계자들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특검팀이 일단 이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대통령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존중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검팀의 표정에는 아쉬움과 허탈감이 묻어 있었다. 송두환(宋斗煥) 특별검사는 “어느 쪽으로도 마음의 준비는 돼 있었다”며 말을 아꼈지만 서운한 표정이 역력했다.

김종훈(金宗勳) 특검보도 이날 오전 브리핑에서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수차례나 사용했다. 어조도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특검팀은 이날 성명서를 통해 “일반 검찰보다도 정치적 중립과 독립적 직무가 보장되어야 할 특검의 수사가 정치적 고려에 의해 중단된 점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특검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김 특검보는 “특검팀이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을 조사하지 않는 대신 수사기간 연장을 받아내려 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하나(김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포기하면서도 조사하려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진상 규명을) 하려고 했는데…”라며 진한 여운을 남겼다.

특검 수사 막바지에 불거진 현대건설 비자금 150억원의 돈세탁 과정을 추적하던 자금추적팀 파견 수사관들은 수사 종결에 몹시 허탈해했다. 일부 수사관은 “(특검 연장을 둘러싸고)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특검팀은 그간의 수사 성과에 대해서는 대체로 자부하는 모습. 김 특검보는 “대북 송금 규모와 실체를 새롭게 파악했다고 자부한다”고 자평했으며, 다른 특검 관계자는 “수사 결과가 발표되면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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