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에 北송금 全과정 보고' 파장]명분 빛바랜 '통치행위론'

  • 입력 2003년 6월 19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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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대북 송금과 관련된 협상 내용과 환전 및 송금 사실을 모두 보고받았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김 전 대통령 조사를 둘러싼 논쟁이 더욱 격화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을 포함해 당시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남북정상회담과 대북 송금은 별개”라고 줄곧 주장해왔다. 최근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에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며 이에 가세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송두환(宋斗煥) 특별검사팀은 김 전 대통령이 임동원(林東源) 전 국가정보원장 등으로부터 대북 송금 과정을 보고받았다는 관련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임 전 원장은 이미 특검에서 환전 편의 제공 및 송금 사실을 김 전 대통령에게 사전 보고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의 수사 초점이 김 전 대통령 쪽으로 모아지고 있는 모습이다.

김 전 대통령도 2월 14일 대국민담화에서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현대 관련 얘기를 잠깐 들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이는 현대의 대북 송금을 사전에 알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시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김 전 대통령이 ‘잠깐’이 아니라 대북 송금의 전 과정을 보고받고 이를 승인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사건의 최종 책임은 김 전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현대측으로부터 받은 남북정상회담 추진비 150억원을 구여권의 정치비자금으로 사용했을 경우에는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통치행위론’도 크게 훼손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남북관계와는 무관하게 정치비자금으로 활용했다면 ‘남북 화해를 위한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었다는 통치행위론의 명분과 논리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전 장관이 “정상회담을 위한 1∼4차 예비회담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정상회담에 대해서만 논의했다. 대북 송금 얘기는 꺼낸 적도 없다”며 여전히 ‘방패막이’ 역할을 해 진상규명에는 적잖은 난관이 예상된다.

결국 특검팀은 △박 전 장관이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에게 ‘정상회담 준비 비용’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고 받은 과정 △현대측으로부터 받은 돈의 사용처 △김 전 대통령에게 이를 사전 사후 보고했거나 논의한 적이 있는지를 밝혀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내부적으로 1차 수사기간 연장의 필요성을 결정한 특검팀은 1차 수사만료(25일) 이전에 박 전 장관과 임 전 원장을 상대로 대북 송금을 김 전 대통령에게 사전 보고한 경위를 집중적으로 추궁할 방침이다. 특검팀은 당분간 150억원 등 박 전 장관이 받은 돈에 대한 자금추적에 주력하면서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방식 검토를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청와대 "DJ조사 안되는데…"▼

청와대가 대북 송금 사건 특검 수사 기간의 연장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특검팀은 20일 수사 기간 연장을 요청하겠다고 밝혔지만 청와대로서는 ‘수사상 필요’라는 법 논리와 호남을 중심으로 한 ‘기존 지지층의 이탈’이라는 정치 현실 사이에서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다 수사 기간 연장이 자칫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로 이어질 가능성도 청와대의 고민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청와대 내부의 기류도 다소 엇갈린다.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비롯한 법률가 출신들은 명분과 법 논리상 연장 요청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 반면 문희상(文喜相) 대통령비서실장이나 유인태(柳寅泰)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등 정무라인은 정치 현실을 앞세워 연장 거부쪽으로 기울어 있다.

우선 주무 수석비서관인 문 수석은 “특검팀이 제출할 연장신청 사유가 합당한지를 따져서 결정할 문제다”라고 밝히고 있다. 법적 타당성에 근거해 판단하겠다는 얘기다. 문 수석은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의 150억원 수수혐의에 대한 추가 조사 필요성에 대해서도 “연장 사유가 되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원론적 답변만 되풀이했다.

다만 그는 DJ 조사 부분에 대해서는 “국민이 공감하는 아주 뚜렷한 범죄혐의 없이 가볍게 전직 대통령을 조사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이와는 달리 유 수석은 “사실상 핵심적인 부분은 수사가 끝난 것 아니냐”며 수사 기간 연장에 부정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수사 기간 연장이 몰고 올 정치적 파장을 감안해야 한다는 게 정무라인쪽의 판단이다.

한편 민주당은 대체로 특검 연장 반대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송영길(宋永吉) 임종석(任鍾晳) 의원 등 소장파 의원들은 18일 유 수석을 만나 ‘특검 연장 불가론’을 강력히 주장했고 비주류인 박상천(朴相千) 최고위원과 정균환(鄭均桓) 원내총무도 “특검이 기간 연장을 위해 교묘하게 수사 진행 상황을 흘리고 있다”고 연일 비난하고 있다.

다만 김근태(金槿泰) 의원은 19일 박 전 장관의 150억원 수수혐의를 규명하기 위해 10일간의 제한적인 기간 연장을 주장하고 나섰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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