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난담]성인소설 작가가 말하는 우리시대 성적 판타지

  • 입력 2003년 6월 19일 17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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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어느 여름날 나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친구는 없고 친구의 누나만 마루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간 치마 사이로 친구 누나의 하얀 속옷이 보일락 말락 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마루로 올라갔다.’

고등학교 남자 화장실 벽에나 쓰여 있던 음담패설들이 인터넷에서 ‘야설(야한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거의 10년 전 일이다.

네이트 닷컴 엑스도어(xdoor.nate.com)는 이런 야설과는 격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본격 ‘성인소설’ 사이트다. 작가 34명이 97년부터 단·중·장편 소설 1만여건을 올려놓았고, 하루 평균 5만여명이 방문한다.

작가 중에는 전직 초등학교 교감선생님과 현직 동화작가도 있다.

이들 작가 중 한 문학 계간지를 통해 등단한 이채씨(필명·32·여)와 모 스포츠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김현씨(필명·33)가 남자와 여자의 성적 판타지에 대해 15일 서울 종로구 무교동 한 술집에서 2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성인소설도 문학의 한 장르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지만 얼굴과 본명이 공개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 1위 ‘대리만족’, 2위 ‘자위’

김현=인터넷에서 떠도는 ‘야설’은 기승전결 구조도 없는 낙서에 불과해. 우린 일정 수준의 소설 구조를 갖추려고 노력하잖아. 성인소설이나 에로티시즘 문학이 맞는 말이지.

이채=나는 에로티카(erotica)라는 말이 참 좋아. 단지 ‘꼴림’만을 추구하지 않고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성적 관계들을 표현하지.

김=사람들은 현실에서 접하지 못하는 성적 상황을 대리만족할 수 있는 매개체를 찾아. 포르노 영화를 보고 인생을 느꼈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내 글을 보고 뭔가 깨닫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주목적은 즐거움이야.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잠시나마 괴로운 일상을 잊고 몰입해서 즐겁게 읽으면 되거든.

이=1997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여자로는 처음이었을 거야. 처음에는 성적으로 자극하는 글을 잘 못 쓰겠더라고. 많이 헤맸지.

김=여자가 성인소설을 쓰면 메리트가 많잖아. 대다수가 남자인 독자들은 소설을 작가의 경험담으로 보거든. 여자 작가이고 실체가 베일에 싸여 있으니까 더 궁금해지고.

이=하지만 남자의 성 심리를 모르니까 추측으로 써야 하는 게 어려워. 다른 남자 작가들 작품을 참고하지만 그래도 남성 심리를 파고들어 감동을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김=독자는 그야말로 대리만족하는 거야. 그런데 처음 보는 여자를 꾀어서 같이 잤다고 쓰면 진짜로 그렇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그래서 좀 더 에로틱하게 묘사하고 싶어도 그런 독자들 때문에 자기 검열을 해. 원하는 묘사의 70% 정도 쓸까.

지난해 이 사이트가 독자들을 상대로 사이트를 찾는 이유를 설문조사한 결과 1위가 ‘대리만족’이었고 2위는 ‘자위를 하고 싶어서’였다.

이=또 현실에서 남녀가 정상 체위로만 성생활을 하는 게 아닌데 우리가 애널 섹스를 묘사하면 검찰이나 경찰에 음란물이라고 걸리기도 하잖아.

김=게다가 성적인 자극은 마약과 같아서 한번 쓴 소재는 더 못 쓰고 좀 더 자극적인 걸 찾다 보면 한계에 도달하고…. 풀어야 할 숙제야.

이=소재는 널려 있어. 성인소설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잖아. 동네 슈퍼마켓 아저씨가 화내는 걸 보고 뭔가를 상상해 내기도 하고 언니가 말해주는 형부와의 성 트러블도 소재가 되지. 주변 사람들을 좀 더 세밀하게 지켜보는 눈을 가져야지.

●친구의 누나 VS 형수의 침실

김=남녀 작가는 관점에 차이가 있다고 봐. 그렇지만 작가의 성별을 모른 채 이채씨 작품을 보면 여자의 작품이라고 느낄 만한 게 별로 없어. 다만 여자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건 있겠더라. 예를 들면 성관계 중에 여자가 갑자기 생리를 해. 난 이 때 여자의 심리를 도저히 알 수 없거든. 여자가 성관계를 마치지 못해 아쉬울까 아닐까…. 그래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할 때면 표면적인 심리 묘사밖에 못해.

이=내가 여자라서 잘 아는 상황은 있지. 여자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위행위가 그래. 여자가 왜 어떤 상황에서 자위를 하는지 그 실제 심리를 잘 묘사할 수 있으니까. 남자 심리를 잘 모르면 남자한테 직접 물어보기도 하지.

김=남자의 성적 판타지는 두 가지야. 여자가 다가와 의도하지 않은 성관계를 갖는 것과 자기가 여자를 유혹해 관계를 맺는 판타지. 술집에서 본 굉장히 섹시한 여자를 어떻게 잠자리로 끌어들일까 공상만 하지 실제로는 절대 못하는 게 우리나라 남자야. 그런 심리를 드러내서 쓰면 독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아니면 접촉사고가 났는데 상대 운전자가 아주 섹시한 여자야. 이 여자는 미안하다며 명함을 건네주면서 연락하라고 유혹해. 그리곤 연락해서 만난 여자에게 당하듯이 성관계를 맺는 거야.

이=그런데 왜 남자들은 그렇게 형수에 집착해?

김=남자가 가장 선호하는 성적 환상의 소재는 친구의 누나, 형수, 선생님이야. ‘친구의 누나’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제목만 보면 ‘친구’, ‘누나’ 아무것도 아니거든. 그런데 조사 ‘의’가 들어가니까 그것만으로 성적 판타지가 돼. 친구 집에 갔는데 친구 누나가 있더라, 예쁘지도 않은데 친구 누나라는 이유 하나로 달아올라. 형수는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는 남이면서 가족이야.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성적 판타지인 거지.

김현씨가 2001년 올린 ‘친구의 누나’와 ‘친구의 누나2’는 지금까지 90여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채씨가 9일부터 연재한 ‘형수의 침실’도 이미 20여만 명이 읽었다.

이=남자가 금지된 관계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면 여성의 판타지는 자신의 몸이야. 뚱뚱해서 남자와 섹스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많거든. 여성의 몸과 섹스가 어떤 연관이 있나 알아내고 싶었어. 그런데 남자 작가 글이 좀 더 자극적이고 야한 것 같아.

●남자는…, 여자는…

김=글쎄. 여자보다 성적 경험의 폭이 넓어서 그런 것 아닌가. 행위를 묘사해도 더 변태적으로 세밀하게 갈 수 있고. 그런데 성폭행 장면 묘사는 훨씬 과격한데 좀 별로야. 여자 작가들은 진짜 당하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이=나는 강간에 대한 환상을 어느 정도 갖고 있어. 마치 동물들이 교미를 할 때 암컷은 수컷을 선택할 권리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해야 되나. 이런 거나 여성이 생리할 때 심리 같은 걸 남자들은 잘 알려고 하지 않지.

김=그래서 여자 심리가 이럴 거라고 상상만 하지 여자 마음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지는 않아. 이야기가 너무 관념적으로 되거든. 그러면 독자들이 싫어해.

이=요즘 여성 독자가 많이 늘었어. 이전에는 성적 욕구를 겉으로 표현하면 ‘저 여자는 너무 밝혀’하는 인식을 남자들이 가질까봐 표현하지 못하는 게 많았잖아. 그래서 수동적으로 당하는 여자보다는 적극적으로 성적 쾌락을 찾아나서는 여자들을 소설에 더 많이 반영해.

사이트 1만여 회원 중 여성이 약 30%다. 초기에는 30,40대 주부들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20대 초반 여성들이 늘었다.

김=세대 차이도 뚜렷해졌고. 내 10,20대 기억을 토대로 글을 쓰지만 지금 애들의 심리와는 많이 다르잖아. 성문화도 자기 욕구를 자연스레 드러내는 20대가 주도하지만 거기에 포커스를 맞출 수는 없고. 어떻게 보면 우리가 30,40대 성문화의 마지막 보루인 것 같아.

이=글이 재미있으려면 성행위보다는 상황설정의 판타지가 중요해.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는 금방 질리잖아. 상황설정이 잘 돼 있으면 독자가 자신을 주인공 삼아 상상할 수 있지.

김=성행위의 판타지가 기본이지만 개연성 있는 이야기 구조가 없으면 소설이 아니지. 하지만 독자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과 넘지 말아야 될 기본적인 윤리의 마지노선 사이의 딜레마가 있어. 인터넷 ‘야설’과 분명히 격을 달리해야 하지만 독자가 원하는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그 마지노선을 넘어설 수밖에 없는 거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씨와 김씨는 지난달 각각 약 500만원과 4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휴대전화 소설 서비스가 시작된 올해 수입이 좀 늘었다. 이들은 한 달에 원고지 60장 분량의 단편 4, 5편과 장편 연재, 음성소설용 단편과 만화시나리오 등을 사이트에 올린다.

정리=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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