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돌아온 영웅

  • 입력 2003년 6월 18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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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도시국가 가운데 베네치아공화국은 독특하게도 영웅을 거부하는 ‘안티 히어로’의 국가였다. 베네치아인의 기질은 현실주의적이고 공동체의식이 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네치아는 바다 위에 위치해 외국과의 교역이 아니면 생존수단이 없었다. 이들은 공화국 내에서 권력이 한곳에 집중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영웅에 의한 선동정치는 국익과 상관없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라를 몰고 간다는 게 이들의 믿음이었다. 당시 경제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했던 ‘베니스 상인’다운 발상이었다.

▷베네치아 지도부는 대중적 인기를 모으는 인물을 경계했다. 국가원수가 존재했지만 실권이 거의 없었고 국회가 있었지만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1년마다 멤버가 바뀌는 ‘10인 원로 위원회’가 결정했다. 개인은 믿을 수 없는 존재이며 결국 부패한다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믿음이었다. 이들의 철저한 ‘반(反)영웅’ 철학이 과연 이상적인 것인지는 결론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18세기 말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0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영화를 누린 것은 남다른 정치체제 덕분이었다.

▷영웅이냐 반(反)영웅이냐의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오늘날 영웅의 조건이 크게 변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과거 영웅들은 영토를 확장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한 인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인물들이었으며 여기에 어렵고 불리한 여건을 극복한 사례까지 곁들여지면 대중은 더욱 환호했다. ‘영웅론’의 저자 토머스 칼라일은 ‘영웅이 역사를 이끈다’고 단언했지만 지금은 과거 나폴레옹이나 크롬웰 같은 소수 정치가에 의해 세계의 역사가 좌우되는 시대는 아니다. 오히려 경계해야 할 것이 자신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가들의 독선과 환상이다.

▷오늘날 영웅을 찾는다면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사회 곳곳에서 묵묵히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의 영웅들이다. 이 점에서 지난해 6월 서해교전에서 안타깝게 산화하거나 부상당한 해군들이야말로 영웅으로 내세우기에 적격이다. 당시 큰 부상을 당해 치료받던 이희완 중위가 현역에 복귀한 것은 감동적이다. 사회가 이들을 격려하고 칭송할 때 공동체의식과 국가로서의 생존력은 한층 강화될 것이다. 그럼에도 ‘부끄럽지 않은 군인이 되겠다’며 겸손함을 보이는 이들에 비하면 ‘성공한 대통령인지는 내가 평가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나 ‘편 가르기’로 나서는 권력층의 행동에선 왜곡된 영웅심리 같은 게 느껴져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홍 찬 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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