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춘의원 편지 전문

  • 입력 2003년 6월 17일 15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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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 꿈을 제시하십시오!

노무현대통령께

도저히 더 이상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대통령 취임 100일을 경과하면서 언론과 세간의 입방아를 통해 신정부와 새 대통령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과 충고가 많았습니다만 대통령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군요. 그 후로도 매일같이 터져 나오는 대통령의 홍수같은 말의 성찬을 보면서 느끼는 감입니다. 저야 국회의원이니 의정단상에서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주문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지만 그 자리는 아무래도 안팎으로 당파성의 제약과 오해를 받는지라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을 선택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반대당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새 대통령에게 많은 기대를 했고 또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지긋지긋한 지역주의의 망령을 깨고 정치권과 정부를 포함해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갖가지 부조리를 혁파해내는 개혁자의 역할, 우리 경제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선진국 도약의 꿈을 현실화시키는 견인차의 역할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취임 4달도 채 되지 않아 그 기대가 전임 대통령의 전철처럼 배반당할 것 같다는 예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예감은 이 나라를 고쳐보겠다는 대통령의 선의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개혁의지를 뒷받침할 준비의 부족과 방법의 서투름 때문입니다.

정치권 안에서 YS와 DJ 정권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새 대통령이 주도권을 쥐고 일할 수 있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5년 임기 중 1년 남짓한 시간이 자기 방식으로 정부의 인적, 구조적 시스템을 재편하고 민생 안정과 개혁 드라이브를 통해 여론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이지요. 그 시간동안 성공적인 이륙을 해내어야지만 5년을 밀고 나갈 수 있는 동력이 확보될 수 있습니다. 그러지 못하는 정권은 권력을 쥐고 있어도 써먹을 수 없는 소위 식물정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선 두 정권이 어느 정도 초기화 작업에 성공했어도 후반기에는 무력한 권력으로 전락했던 것을 보면 시간이 더욱더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간에는 이제 백일잔치를 끝낸 신생아가 과연 수명을 다할 수 있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대선 때 당신을 반대했던 층에서 주로 나오는 소리지만 지지층 중에서도 이반현상이 무시할 수 없는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대미외교와 대북송금 문제 등 이 작은 나라의 대통령으로서는 불가피하게 욕먹고 책임져야 할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비난들 중에는 대통령과 그 참모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돌아가야 할 일들도 많다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대통령직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노대통령 본인의 인식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재야나 국회와는 달리 정부의 제1임무는 국가와 사회질서의 수호입니다. 이것은 수구꼴통의 대통령이든 공산국가의 대통령이든 동일한 임무입니다. 인류사에서 국가와 정부의 출발은 바로 이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태생적 임무에 소홀할 때 정부는 불신받게 됩니다. 정부가 이익단체들의 실력행사를 두려워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약간의 혼란을 면책받고자 실정법과 규범적 질서를 등질 때 다수의 국민들은 정부를 등지게 됩니다. 정당한 요구는 적극 수용하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한 대처를 하는 정부를 국민은 바라고 있습니다.

두번째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도 들어 진부한 주문이 되겠지만 역시 말을 정제해 달라는 것입니다.

공인 특히 대통령의 말은 그야말로 천금의 무게를 가져야 합니다. 건방진 비판이 될지 몰라도 대통령께서는 사석에서나 할 말을 공석에서 너무 남발하고 있습니다. 사석에서는 의사소통에 장점이 될 수 있는 어법도 공석에서는 흠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공개되는 대통령의 말은 정치적, 외교적, 사회적, 심지어는 경제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원수의 말은 사전에 기획되고 조정되는 참모회의의 과정을 거칩니다. 재임기간이 경과할수록 대통령은 여론과는 멀어지는 반면 점점 더 오만해집니다. 그러기 전에 저는 노대통령께서 이런 과정에 보다 익숙해지는 프로 대통령이 되길 기대합니다.

언론과의 긴장관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소위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언론의 여론 지배에 대해 대선 전부터 강한 문제제기를 해온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대통령이 되고 난 지금까지도 그런 전투적 심사를 내보이는 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입니다. 물론 보수언론이 대통령에 대해 반감과 불신을 갖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그들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조중동결정론’은 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기 어렵습니다. 방송이나 인터넷 매체 등 상대적으로 노대통령에게 유리한 언론환경도 존재합니다.

지금 국민들의 지지율 하락은 근본적으로 대통령의 행보와 언행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지, 과장과 폄하는 있을지언정 조중동의 작문에 의해서 창조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대통령의 말처럼 언론과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강한 상호긴장관계를 유지하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을 넘어서는 적대적 감정의 노출과 인위적 언론시장 재편 시도는 국민이라는 배심원의 눈에 건강하게 비치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판단하게 하십시오. 이미 그들은 잘 분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국민들에게 꿈을 제시하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는 대통령께서 ‘국가의 개조’를 목표로 제시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저도 그러한 문제의식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무엇을 위한 국가개조인가? 그 목표가 알기 쉽게 국민들에게 제시되어야 합니다.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국민은 정의만을 먹고 사는 천국의 시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당신을 지지했던 시민들 대다수는 현실보다 이상에 더 많은 점수를 주는 사람들입니다만 그들조차도 궁극적으로는 빵이 없는 이상, 발전없는 고통의 정의를 오래 감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대통령이 가장 주력해야 할 일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경제 살리기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재벌들의 요구를 다 수용하는 것이 경제 살리기는 아닐 것이고 우리 국민들도 그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습니다. 이 나라가 국민소득 1만불의 고개에서 허덕이는 것은 과거 개발경제의 체질과 패러다임으로는 선진국 도약의 꿈을 이룰 수 없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2010년까지 국민소득 2만불시대 달성과 같은, 노력하면 이루어낼 수 있는 가시적인 목표를 제시하십시오(강한 경제에 수반되는 환율요인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목표도 아닙니다).

선진경제를 이룩하기 위한 경제개혁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대통령이 앞장서 뛰어야 합니다.

경제성장의 동력을 전략적으로 설정하고,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기적 고용창출의 전망을 제시하고,노사관계의 안정화를 위한 지난한 노력들의 현장에 대통령이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당신의 모습이 국민들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야 합니다. 그 강한 인상은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미래를 위해 고통을 함께 지고 갈 수 있는 집단적 공감대를 만들게 할 것입니다.

대통령과 정부를 믿고 따라야겠다는 국민적 공감을 확보할 때, 국가개조를 위한 당신의 노력도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5년이라는 짧은 재임 기간 중 모든 것을 다 개혁해 낼 수는 없습니다. ‘국가의 개조’도 대통령이 시작해낼 수 있을 뿐입니다. 과욕을 자제하고 관심을 줄여 장관들이 통상의 개혁작업을 담당케 하고 대통령은 경제 선진화와 올바른 통일 기반의 조성에만 몰두하는 전략적 집중을 기하십시오. 그럴 때 국가개조는 저절로 따라올 것입니다.

‘줄서라’ 같은 말을 농담으로도 하지 말고 공무원들이, 국민들이 마음으로 줄서게 만드십시오. 선의의 개혁자가 나라의 운명을 추락시킨 사례도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도약이냐 추락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저는 노대통령께서 도약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충정에서 이 글을 썼습니다. 이런저런 할 말이 많았지만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이만 줄이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2003.6.15

대한민국 국회의원

김 영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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